제 몫의 후회는 제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금계화 2015.06.02 17:20:45







18살, 여고생입니다. 여태껏 속마음 터놓을 곳 없이 혼자서만 앓아왔는데 가만 두었다간 곪을 지경이라…… 망설이다 글 남겨봅니다.

긴 글이 될 것 같아 걱정도 되네요. 답변 달릴 것 기대 않고 일단 적어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연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차츰 배우라는 묵직한 타이틀에 걸맞게끔 성장하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는 사람들이 온전히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을 연출하고 싶습니다.

연기나 연출, 영상, 연극과 영화에 대한 지식은 일절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현재는 무지한 상태입니다. 그런 만큼 더욱이 배우고 싶습니다.



 다만 제게는,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흐릿한 열정과 경외심만 있을 뿐 용기는 없는 듯 합니다.



중학교 다닐 적에는 하라는 대로 공부 열심히 했고, 이후 근방에서 알아준다는 고등학교에 무탈히 입학했습니다.

음……

저는 고등학생만 되면ㅡ밤 늦게까지 야자 하고, 문제집 풀고, 책만 많이 읽으면, 없던 꿈이 곧장 생기는 줄 알았나 봅니다.


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치열했고, 훨씬 힘들었고, 제 또래 아이들이 으레 그러는 듯이 다 포기하고 싶다가도 내가 너무 약한 소리 하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남들 다 한다는 입시준비 좀 하는 게 무슨 대수냐, 지나고 나면 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게다가 성적이 엄청나게 우수한 것도 아니고, 그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소리 아니냐, 괜히 공부 하기 싫어서 핑곗거리 만들고 징징대는 것 아니냐ㅡ이런 식으로, 애써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했구요. 분명히, 그 대상이 무엇이 됐건 간에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말입니다…



20년도 덜 되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몇 차례의 고비가 있었을 것입니다. 태어나는 순간,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 몸을 뒤집는 순간, 막 걸음마를 떼는 순간, 아주 어릴 적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혼나던 순간 외 다수.


작년 겨울 무렵은 제가 기억하는 인생의 고비와도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뭘 해도 확신이 없었고 자신감도 없었고. 요즘이 100세 시대라는데 도대체 80년을 어떻게 더 사나 그런 생각도 하고. 슬럼프 비슷한 게 찾아왔었습니다.


때마침 정말로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처음 보았을 적 신세계를 느끼게 한 영화였습니다. 제게는 정말 큰 위안을 안겨줬기에 DVD 까지 사놓고선 고등학교 들어온 이후로는 한 번도 못 봤던 그 영화. 아마 살면서 가장 많이 보았을 그 영화.

중학생때부터 기분 적적할 때면 보았던 그 영화. 러닝타임이 거의 3시간 가까이 되는 그 영화. 빨간색이 참 슬프게 예뻤던 그 영화.

누군가 좋아하는 배우가 누구냐 물었을 때, 장국영과 공리라고 하였다가 애늙은이 취급 받게 만든 그 영화.

패왕별희.

(ㅎㅎ지금 생각해보면 장국영과 공리를 좋아했다기 보다는 작중 인물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방구석에 몰래 숨어 들어와 영화를 훔쳐보고 있노라니, 문득,

제가 여태껏 진심으로 하고 싶어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기가 안 나요.

내 몸의 구성요소 중 6할 정도는 '후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사건건 후회를 하며 살았는데,

제 나름대로의 큰 결심을 했다가 정말로 크게 후회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희망 진로 말씀드리기가 겁 나요. 연기의 연 자도 꺼내기가 어렵습니다. 여태껏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이게 웬 뚱단지같은 소리냐고 하실텐데, 제 진심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연극영화과 진학을 목표로 하려면 아마 입시 학원을 다녀야 할텐데, 학원비도 경제적으로 부담이 많이 될테고.

그러면서도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된 연기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구요. 극단에서 배우는 것도 정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고, 어쩌면 연극영화 전공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싶기도 한데, 너무 막막하고 막연하다보니 결국 결론은 안 나고. 많이 답답합니다.


……정말 열심히 할 자신 있는데요ㅠㅠ 물론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지만요…


아무튼 이건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공포감인지, 요즘 아무것도 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조급해지고 두려움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자책에서 시작된 걸까요? 도대체 뭘 해야 할까요. 아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 용기를 못 내 숨고 있는 것일까요. 얻은 건 없는데 잃고만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아무 말이나 해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든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부탁드립니다. 요즘 모든 게 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것처럼 느껴져요……

제발 스스로에게 확신할 수 있도록,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제 몫의 후회는 제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흐아 새벽이라 남 생각 못하고 정말 생각나는 대로 주절주절 늘여놓은 탓에 읽기 불편하셨을 것 같아요ㅠㅠ

지금까지 두서 없이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