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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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컴이 죽어버리면

marlowe71
2001년 06월 22일 00시 08분 19초 1223 3 4
화요일 아침에 컴이 죽어버렸다.
부팅을 하다말고 배경화면만 덩그러니 뜬채 감감무소식,
윈도우즈 시스템 디렉토리의 무슨무슨 파일인가가 손상되었다는 창이 뜨고 만다.
그냥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용산에 전화를 해봤다.
(내 컴은 용산 조립품이다...)
전화로 띄엄띄엄 시키는 대로 리셋하고 F8 누르고 프롬프트 온리로 들어가고....
하는데도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거다.
수화기 저편에서 "그래도 안 되냐?"고 하더니, 자못 심각한 목소리로
"파일들 백업은 해두었냐"고 묻는 거였다.

......그때부터 내 공포는 시작되었다.
백업같은 거 해둔지 오래고 그 이후로 문서파일들은 제각기 수없는 변화를 겪었는데.
최악의 경우 하드 전체를 포맷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짐을 넘어서 하늘이 캄캄해지고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만다.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다음날인 수요일 저녁에 직접 사람이 오기로 했다.
그 하루 반의 시간동안 모처럼 컴퓨터를 벗어나서 홀가분하게(?) 책도 보고 뒹굴거려보기도 했지만,
공포는 내 몸뚱아리를 내내 짓누르고 있었다.

컴에는 지난 6, 7년간 비록 매일은 아니지만 꾸준히 채워온 내 일기들이 들어있고,
그동안 한줄 두줄씩 역시 꾸준히 채워온 각종 구상들, 단상들이 들어있고,
게다가 바로 전날 밤에 써낸 단편시나리오 초고도 들어있고,
소리바다와 냅스터를 뒤적거려서 모은 수많은 음악파일들이 들어있는데....
그 모든 것이 '말소'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저려오고... 무엇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거였다.
보통 이하 수준의 내 기억력 때문에 뭐든 일단 써놓고 보자는 태도로
내내 쌓아온 내 데이터베이스가, 비록 많은 분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순간에 delete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슨 일이 손에 잡힐 수가 있었을까.

최악의 재난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때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해보니, 정말 나는 기억이 이식된 사이보그 정도도 못 되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괜히 심각해져서 인간의 조건은 뭔가... 하는, 용량에 벅찬 질문도 해보고....
애써 최악의 사태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새로 시작하자'는 다짐도 미리 해보았지만
그래도 진정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수요일 저녁이 되어 파일 손상은 전혀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나는 거의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되살아난 컴을 붙들고 수요일 필커 정기채팅에도 들어가고
이젠 좀 시들한 스타크래프트도 괜히 한번 해보고 (오랜만에 하니깐 어렵더구만...;;)
그러다 보니 비록 펜티엄도 아닌 셀레론인 내 컴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 거였다.
더불어 앞으로는 꼭 정기적으로 중요한 파일들을 백업해두어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고 있다..

여러분... 소중한 자료들과 시나리오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평소에 백업해둡시다, 꼭.
죽은 아들 XX 붙잡고 울어봐야 소용없답니다.. ^^;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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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9000
2001.06.22 06:38
제가 작년에 말로우형이 당할뻔한 일을 당하고 말았었지요. 하드포맷하고 일주일 동안 입에서 저절로 침이 질질 흘러 내리더랍니다. 닦을 기분도 안나고 그냥 질질 내버려 두기도 했죠. 전 그 일 이후에 더 순간적인 인간이 되어갑니다.
날아가버린 내 정보들이 흐르는 침에 흘러가게 두는 아.. 공짜같은 인생아-
uni592
2001.06.22 16:31
말만 들어도 아찔한...
우리집 컴은 복구 기능이 있던데... 그것과는 상관없는 얘기인 것 같군.
수시로 파일 정리 해주시고 홈페이지라도 만들어 올려 놓는 방법도 좋을 듯 하네요...
vincent
2001.06.22 23:34
읽는 동안 내내 손에 땀을 쥐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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