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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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취객 구출 대소동

vincent
2001년 10월 29일 09시 41분 29초 1311 9 2
헐리우드 B급 영화를 가끔 TV에서 방영할 때
주로 이런 제목을 달고 나오죠. 무슨무슨 대소동...
그렇게 황당한 일을 겪어서 제목도 그렇게 붙여봤어요. --

토요일에 오래간만에 친구 만나 단둘이 참 오랫동안 수다 떨며 술 한 잔 했어요. 제 지론인 가끔 떠는 '뒷다마'는 정신 건강에 반드시 필요하다..를 실천하면서.
물론, 언제나처럼 그 친구가 다다다다..얘기하고 나면 말빨 없는 저는.. 응.. 그래.. 그렇지.. 이 정도 맞장구나 추임새를 넣는 정도였지요.
약간 취기가 돌 즈음 차나 한 잔 하고 가자(이래놓고 정말 차를 마신 적 별로 없지만)면서 나왔는데...
정류장앞에 웬 멀쩡한 차림새의 여자가 만취된 채 널부러져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군데군데 오바이트를 해놓고 앉아서도 계속...(속 뒤집어지실 분들을 위해 자제하겠습니다).
비겁한 저는 그냥 가자고 했지만 절대 그런 꼴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열혈 정의파 제 친구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가방에 있는 휴지도 꺼내서 닦아주고 정신차리라고 다독거리고 그랬답니다(<엽기적인 그녀>의 그녀와 견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 친구랑 전 늘 그렇죠).
장소가 장소다 보니 주변에 수상해 보이는 남자들이 계속 주위를 맴돌며 술 취한 그녀를 주시했고, 우리는 아무래도 불안해서 여자에게 누군가 데릴러 오라고 전화를 하라고 한 후 그 때까지 같이 있기로 했습니다.
간신히 그녀를 벤치로 옮겨 온 후 전화가 오길래 술 취한 그녀 대신 받아서 위치를 알려주고, 제 친구는 편의점에 그녀의 입을 행궈줄 물과 휴지를 사러 달려 갔죠.
후- 한숨 쉬며 취해 벤치에 누워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는데 또 전화가 왔습니다. 얼른 받아서 "오시는 길이세요?"했는데
아뿔싸! 상대편에서 "네? 누구세요?" 그러는게 아닙니까.
어? 다른 남자네... 이를 어째...
취한 그녀에게 제발 전화 좀 받아보라고 해도 막무가네...
하는 수 없이 전화 얼른 끊었는데
이 때 편의점에 갔던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왔죠.
다시 울리는 전화벨.
제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얼른 받는 친구.
장소 설명 장황하게 늘어놓고...
친구가 끊자마자
"야, 아무래도 딴 남자 같애.."
친구의 눈 커지고... 둘이 마주보며 어떡해...
이 때, 다시 전화가 오고... 친구와 전 신중하게 대처하기 위해 발신자 전화번호가 뜨면 그걸 외워서 구분해서 받기로 했습니다.
019..어쩌구 저쩌구...제가 그 번호를 적어 외웠지요.
가까이 왔다는 전화.
다시 또 전화 오고... 011..어쩌구 저쩌구...
또 가까이 왔다는 전화.
과연, 누가 먼저 올까.. 하던 차에
한 명의 모르는 남자 전화 또 오고.
슬기롭게 대처. "바쁘시니까 내일 전화 주세요."
둘이 어이 없어 쳐다보며... 이 여자 정말 능력 있네...
그러고 있는데 한 명의 남자가 막 뛰어와요.
남자가 오자마가 남자를 빤히 보며 친구가 하는 말.
"011이세요 019세요?"
남자의 황당한 표정. 정말 웃겨 죽는 줄 알았지만 꾹 참았지요, 전.
남자는 힘 주어 자기가 애인이라고 하더니 지갑에서 뭔가 막 꺼내요. 당연히, 친구와 전 명함을 꺼내나보다..했지요.
그런데, 마침 남자가 꺼낸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지요.
궁금해서 보는데... 남자가 주워서 보여주는게...
전 정말 웃음 참느라 혼났어요..
글쎄, 엄지손톱 만한 스티커 사진이었어요. 여자랑 같이 찍은.
그 순간에 그걸 보여줄 생각을 한 그 남자.. 어찌나 진지한지...
사실, 우린 그녀가 술 취해 계속 고개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못봤거든요.
"얘가 원래 술 잘 못해요. 소주를 먹인 모양인데... 오늘 스튜디오 사람들이랑 회식 했나본데... 하여간 이렇게 보내고 걸리면 죽었어 다들..."
장황하게 설명하는 남자를 멀뚱멀뚱 보다가 뒤늦게 펼쳐질 복잡한 남자관계에 얽힌 일들이 생각나서 얼른 자리를 수습하고 가려는데
아 그 때! 숨을 몰아쉬며 뛰어오는 또 한 명의 남자.
아... 이럴 어째...
심상치 않은 두 남자의 눈빛...
애인인 남자가 늦게 온 남자에게 "누구세요?"그래요.
늦게 온 남자를 향해 보내는 우리의 안타까운 눈빛.
남자, 뭔가 생각하다가 "친군데요..." 현명하게 대처한거죠, 나름대로. 그리고는 뒤에 해서는 안될 말을 덧붙였습니다. "오늘 같이 술 마셨거든요..."
아아, 이를 어째... 아까 애인인 남자가 한 "걸리면 죽는다"는 말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려는 친구를 억지로 끌고 차 한 잔 마시러 가서는 또 맥주를 시켰습니다.
그 뒤에도 여러가지 웃지 못할 일들이 펼쳐졌지만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렵니다.

여러분들. 취객 구출할 때... 특히 여자 취객을 구출할 때... 복잡한 이성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거... 기억하세요.

추신. 그런데 그 여자... 다음날 정신 차리고 얼마나 황당해할까요.
일어나 보니 남자들 다 정리됐다든지... 이런거 아닐까요.


9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sandman
2001.10.29 15:01
역시 전공은 못 속이는 군요. ㅋㅋ. 전에 어느 누가 게시판에 단편 글 올렸던 데.. 그 이야기 관두고 이 이야기 단편으로 찍으라고 하고 싶네요.... 제목도 좋고... 메세지도 있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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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somina
2001.10.29 17:01
^^
wanie
2001.10.29 22:37
같이 정신건강 뒷따마 까는 그 정의로운 친구는 누구인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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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220
2001.10.29 23:22
아하하하. 재미있어요! 나중에 제가 찍으면 안될까요? ^_^
vincent
글쓴이
2001.10.30 00:56
wanie군.. 알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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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somina
2001.10.30 00:58
그 술취한 여자 예뻐요 ? -_- a .......
videorental
2001.10.30 06:34
나두 그여자 예쁜지가 잴 궁금하든데...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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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DI
2001.10.31 03:01
아..이거 뒷얘기 마저 좀 써줘요..지면 많아요....
vincent
글쓴이
2001.11.02 00:57
아쉬울 때 그치는 것도... (뒷 얘기는 재미 없어요, 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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