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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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박순경 이야기 (4)

vincent
2002년 04월 22일 07시 45분 35초 1109 1 48

오래간만에 올립니다.
하도 오래 되서 3편에 어디까지 썼는지도 가물가물하네요.
그래도... 이왕 시작한거 마무리는 짓자는 자세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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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발랄함으로는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갔던 영숙언니가 온 집안을 공포로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은
그러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변웅전아저씨(전 자민련 대변인)가 MC를 보던 '묘기대행진' 녹화팀이 우리 동네를 찾았던 그 날 벌어졌다.

당시 변웅전아저씨는 '명랑운동회'의 MC도 볼만큼 인기 MC였기 때문에 녹화 장소가 된 공터는 그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이런 곳에 절대 빠질 수 없었던 영숙언니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던 동생과 나를 앞세워 거기 갔다.
동생과 내가 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그 얼마 전에 동생과 내가 함께 그만둔 태권도장의 사범이 바로 그 '묘기'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언니는 싫다는 우리에게 이유도 묻지 않을만큼 단호한 자세로 우리를 끌고 갔다.
그건 마치... 얼마 전에 사표 내고 나온 회사 사장이 임성훈이 진행하는 퀴즈 프로그램에 나간다고 부장에게 끌려가서 구경하는 꼴과 다르지 않았다. 아주 상식적인 껄끄러움을 영숙언니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보는 동안은 그런 껄끄러움을 모두 잊을 만큼 즐거웠다. 무엇보다 변웅전아저씨(전 자민련 대변인)를 보는 즐거움이 컸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는 한 번도 그런 개인기(?)를 뽐내지 않았던 사범이 사람들 위를 날아다니며 커다란 종이막을 찢기도 하고 심지어 불 타고 있는 원 안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묘기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보너스로....
태권도장에서 봤던 키 큰 오빠들이 사범의 묘기를 위해 기꺼이 장애물 노릇을 하는 희생정신을 보여준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사범의 현란한 '묘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어린이들은 따라하지 말라는 친절한 변웅전아저씨의 당부를 신호로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영숙언니가 보이지 않았다.
날이 벌써 어둑어둑했지만 그래도 동생과 난 늘 있던 일이라 놀라지 않고 우리끼리 손을 잡고 집으로 갔다.

우리끼리 밥을 차려먹고 난 뒤에도 영숙언니는 오지 않았고 전화를 하고 엄마가 왔을 때에도 언니는 오지 않았다. 그 날따라 엄마는 화가 많이 나셨다. 아빠가 오셨는데도 영숙언니는 오지 않았다. 화가 났던 엄마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이윤상군 유괴살해 사건은 그보다 뒤였지만 당시에 학교에서도 노란 깃발에 동네 이름을 적어 같은 동네 애들끼리 줄지어 하교를 시켰던 걸로 봐서 유괴가 무척 기승이었나보다.
그래서 바로 그 때 평소에도 어리버리한 행동으로 주변을 불안하게 만들곤했던 영숙언니의 행동들이 엄마의 머리속을 좌악 통과해나갔던게다. 누가 뭐 사준다고 해서 따라갈리 없는 나와는 달리 누가 뭐 사준다고 하면 뛰어서 쫓아가고도 남을 영숙언니가 엄마의 마음을 짓눌렀던게다.
엄마는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이 사태를 영숙언니의 집에 어떻게 알릴 것인가까지 고민하시기 시작했고 아빠는 요즘도 자주 하시는 "괜찮을거야"라는 짧고 뭉뚱그려진 위로를 하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상상이 마구 나래를 펼쳐가 엄마의 머리속에선 '흉악한 납치범에게 유괴', 아빠의 머리 속에선 '괜찮을거야', 내 머리 속에선 '동네 공터에서 묘기 대행진을 보다가 4차원의 통로로 빠져 들어가 의문의 실종' (동생은 그 때 자고 있었기 때문에 속으로 영숙언니의 사건을 어떻게 그려갔을지 알 수 없다)으로 자리잡고 있을 즈음 영숙언니는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엄마의 상상이 현실이 됐다.
묘기대행진을 보다가 잠깐 짬을 내어 시장에 갔었는데 유괴범이 자기를 쫓아와 도망다니다 왔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화도 못내고 언니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하시며 언니를 붙잡고 우셨다. 영숙언니는 가만히 있다가 엄마가 우니까 따라 울었고, 나도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나라도 침착해야할 것 같아 꾹 참았다.
영숙언니한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엄마가 계속 영숙언니를 잡고 울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냥 자야만 했다.

다음날,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은 그냥 내 귀를 슝슝 지나쳐갔다. 어서 빨리 영숙언니에게 어제 참았던 질문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만 충만(?)해서 누구네 집에 가서 노래자랑을 하자는둥 하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도 뒤로한 채 엄마의 의상실로 달려갔다.

내가 의상실 문을 조심스레 열었을 때, 엄마는 영숙언니에게 원피스를 한 벌 해주겠다며 줄자로 치수를 재고 있었고 영숙언니는 언제 유괴범에게 쫓겼냐는 듯 신나서 어쩔줄을 몰랐다. 미스공언니도 영숙언니에게 신경을 쓰느라 나하고는 눈 마주칠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그 때 묘기대행진을 보다가 시장엔 왜 갔는지, 정말 시장에 가긴 한건지, 유괴범의 인상착의는 어땠는지, 어디까지 도망다니다 왔는지 기타 등등... 물어볼 말들이 너무 많았는데, 아무래도 그 때 물어보면 밉살맞은 아이가 될 것 같아 그냥 꾹 참고 영숙언니를 예의 주시했다.

그 때 뭔가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의상실 문 앞에 어른거렸다.  

"신고 받고 왔는데요...."

문이 열리며 나까지 포함해서 네 명의 여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들어선 그 뭔가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

그 것(?)이 바로 정복을 입은 박순경 아저씨였다.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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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220
2002.04.23 02:57
드디어 박순경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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