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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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때리지마요...

pearljam75 pearljam75
2005년 07월 28일 17시 59분 01초 1776 5 20
가끔 술을 마시다가 잠깐 정신을 놓았다 퍼뜩- 깨어보면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
혹은 드물게는 동이 터오는 아침 길거리 벤취에서 자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 두통...

어제는 대학로에서 이근삼 원작의 <낚시터 전쟁>이라는 재밌는 연극을 보고 그 연극 배우들과 술을 한 잔 하고
...또 깜빡했는데, 눈을 떠보니 내가 성대앞 버스정류장에서 웬 남자의 피를 닦아주고 있었다. 때리지 말라면서...

이건 또 뭐야? 나비효과냐.

빼빼마른 이 남자의 차림새, 여자들이 입는 쫄 끈나시에 여성용 반바지, 빡빡 민 머리.
입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고 주변엔 덩치 큰 대학생들(로 보이는) 두 세명이 존나게 씩씩거리며
끈나시를 입은 남자를 더 두들겨 팰 기세로 서 있었다.

술이 만땅 취해서 제대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녀석들은 술에 취해 이 볼 성 사나운 남자가 맘에 안 든다고 몇 대 팬것 같았다..

그 녀석들이 내지른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안 그래도 괴롭고 힘든데 니가 뭔데, 너까지 지랄이냐!"

하여간 곧 경찰이 달려왔고 대학생들(로 보이는) 녀석들은 저 끈나시 새끼가 먼저 때렸다며
잡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나 멀리서 달려온 경찰의 눈엔 대학생들(로 보이는)녀석들이 먼저
두들겨 팼고 끈나시 남자는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는 시추에이션이었다.

세상에 불만이 많은데 아마 남자가 재수없게 여자옷을 즐긴 탓에 열받아서 팬 것 같다.

그 자리에 하리수가 있었으면 하리수를 팼을 것이요, 김기덕이 있었으면 김기덕을 팼을 것이다.

피를 닦아주다가 다시 달려드는 녀석들을 밀쳐내기도 하다가
경찰이 와서 대충 정리가 되자 나는 신촌행 버스를 탔다.


버스안에서 술도 먹었겠다, 무지한 폭력을 별 이유없이, 옷차림이나 뭐가 맘에 안들기때문에
행사한 젊은이들때문에 전체주의와 폭력은 늘 함께 다니는구나, 질질 짰다. 파쇼여, 제발 안녕.

친구는 다음부터 그런 위험한 곳에 달려들어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한다.
한 대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까..


.
.
.

학교엔 치마를 입고 다니는 남학생이 있었다.
여름엔 하얀 원피스, 봄 가을엔 이쁜 청치마를 즐겨 입는 그 애는
늘 흰 목장갑을 끼고 다녀서 과 애들은 '흰 장갑'이라고 불렀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도 그 애를 취재해갔었고
TV에 나온 그 애는 점점 더 유명해졌다.

심하게 말을 더듬어서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수업시간에 발표라도 할라치면
천재교수만이 알아듣고 감탄을 했다.
친구는 거의 없고 밥도 늘 혼자 먹었다.
왜 치마를 입고 다니는지 흰 장갑은 왜 끼고 다니는지 TV를 보고서야 알았다.

흰 원피스를 입고 남자 화장실에서 용변이라도 볼라치면 남자 교수들이 그 뒷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 일이 벌어졌다.
고시부에서 죽치고 있는, 일탈적 패션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법대 선배들은 저 새끼 존나 맘에 안 든다고 언제 다구리 한번 쳐야겠다며 갈궜다.
병신같은 새끼들. 남이사.

‘흰 장갑’은 늘 학점을 A로 깔았고 그덕에 3년 반만에 졸업을 했다.
군대는 가지 않는다더라, 졸업하고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살더라,
저 상태로는 사법시험 쳐봤자 3차 면접에서 스커트 입고 갔다가 탈락할꺼다, 뭐 그런 소문. 그 이후는 모른다.




이 남학생 생각이 나서, 이 남학생을 손봐주려했던 찐따같은 법대 남자들 생각이 나서,
술김에도 나는 그 끈나시 남자의 피를 닦아줬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정해놓은 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틀 밖에 있는 사람이 견딜 수 없이 재수가 없어 까버리는 습성들.
그래서 삼청교육대를 만든 그 대머리 새끼랑 다를 게 아무것도 없다. 끔찍하다.



홍대에서 3차로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타고 문정동으로 갔다. 택시비 3만원. 허거덕.
재벌가로 시집간 아는 언니네 집에서 동이 틀 때까지 앉아서 청포도를 씹으며
시댁 뒷다마 까는 거 -김수현 드라마에 등장하는 재벌집 며느리 레파토리-들어주다가
지하철을 타고 상암동으로 넘어와 불친절한 <친절한 금자씨>를 조조로 봤다.

무지 피곤하다.
다시는 외박하지 말아야지.
잘 땐 자고 일할 땐 일해야지, 내가 무슨 고삐리도 아니고 밤새 이게 무슨 짓인가,
하지만 남들 다 잘때 세상엔 너무 많은 요상스런 일이 벌어진다.
그래, 남들 다 잘때 나는 깨어있어야지,

이제는 왠지 시나리오가 겁나게 잘 써질 것 같다.

오늘도 바보같은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좀 맞아야겠다.

아, 두통...

Don't look back in Anger.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aesthesia
2005.07.29 09:58
사람을 볼때 장점을 보라는 이야기는 아마도, 펄쨈님같은 분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ㅎㅎ..
펄쨈님의 글중 혹시 어둠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바로 그것은 단점은 아니고 펄쨈님의
변치 않는 '절개'를 더 빛나게 해주는 먼지나 비바람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절개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정말 무섭게도, 두렵게도
뼈져리게 느끼는 지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표현하시는 펄쨈님께 때로
감사하기까지해요..
어느 작가의 글에 이런 글이 있는데, 그 글을 보면 꼭 펄쨈님 생각이 납니다.

작가란, 자신의 속마음을 비추는 것을 두려워 해선 안된다. 물론 내 마음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이 점잖은 일은 못되나, 내 글을 읽는 소수의 독자가 나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그 독자와
진심으로 대화하는 것이며 오직 그것을 통해서라만이 진정한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 자신의 밑바닥의 그것을 헤치는 범위를 넘지않는 선에서는 그정도의 드러냄은
허락되어도 좋을 것이다.

뭐..이런 내용의 글이었는데,,저는 펄쨈님의 그 충실한 독자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고,,
'절개'가 있으신 펄쨈님^-^
그리고 대쪽같은 성품의 빈센트님^-^
그리고 무엇보다 필커 운영진님들^-^


모두, 좋은 분들 뿐입니다~
이말이 너무 하고 싶네요~~
ㅎㅎ
Profile
kinoson
2005.07.29 10:13
언제 술한잔 하시죠...

마침 펄쨈님과 전작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가

이번에는 저랑 일하고 있더군요...ㅋㅋ

뭐 딸라빚을 내서라도 술 사주신다 하셨으니..

그 말 책임지세욧!!!!
Profile
pearljam75
글쓴이
2005.07.30 17:56
aesthesia님/ '절개'라뇨? 그런 거 몰라요. 찌질이 같은 상황에서도 장점을 보아주신다니 감사함다.
kinoson님/아, 딸라빚! 잊지 않고 계시군요. 가을에 한번 자리를 마련해볼까요? 지금은 오링이라...-.-a
Profile
kinoson
2005.07.31 10:35
('') 뭐 정 힘드시다면...지금 우리팀이 장부로 먹는 식당에서

삼겹살에 소주나....물론 장부에 외상으로 큭큭큭....
vincent
2005.08.01 02:56
펄잼님 글 잘 읽고는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 내리다가
aesthesia님의 덧글에 제 아이디가 있어서 일순 당황.

대..대쪽..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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