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전해지지 않은 마음은 오래간다

ty6646
2008년 01월 10일 02시 13분 42초 1402 2
대학교 2학년때 엠티라는걸 갔다. 우리과 전체엠티였는데 그때 간 곳이 주왕산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참 파릇파릇 했고 즐거웠고 건강한 때였던것 같다.
아무튼 그때 몇 개의 조로 나누었고, 난 학생회 간부였기 때문에 우리조 뿐만아니라
다른 조도 함께 돌봐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산에도 갔다왔고, 저녁도 지어먹었고,
또 게임도 하면서 즐겁게 보내다가 잘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큰 비는 아니었지만 옷가지나 텐트가 젖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비였다.
모두들 방수용 텐트를 치고, 물길을 파고 하는 등 어수선했다.

난 우리조의 방수작업을 끝내고나서 다른 조를 둘러보러 나갔다.
마침 옆조에서 도움을 요청해왔다. 옆조는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해서
이불을 준비해 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여름을 앞둔 봄이라
낮에는 그다지 춥지않았지만 밤이되고, 산인데다가,
비도 오고해서 그랬는지 제법 쌀쌀해졌다.

난 그네들이 덮고 잘만한 이불을 찾으러 이리저리 둘러보던 참에
마침 내가 갖고온 비상용 이불이 있음을 기억해내고는 우리조로 되돌아왔다.
텐트안을 열어보니 우리조 아이들이 각자가 가지고 온 이불을
전부 꺼내서 펼쳐놓고 있었고 게 중에는 내가 가지고 온 이불도 있었다.
그래서 난 우리조 아이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내 이불을 둘둘말아 꺼내 들었다.

옆조에 이불을 갖다주니까 무척 좋아라했다.
필요없을줄 알았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이게 되어서 기분좋았다.
난 아이들의 고맙다라는 말을 뒤로한채 우리조로 돌아왔다.
텐트앞에서 물길을 조금 더 손보고 있으려니 텐트를 열고 후배하나가 나와서는
내 앞에 앉는거였다. 그녀의 얼굴표정이 약간 어둡다. 무슨 일일까.....?


『선배 왜 그랬어요?』
『뭘...?』
『이불요... 왜 이불을 갖다주었어요?』
『이불을 안가져왔대쟎아... 그리고 너희들은 전부 가져왔고...』
『하지만 저희들도 춥단 말예요』
『그래도 쟤들은 전혀 없쟎아... 왜 화났니?』
『그런게 아니라 섭섭해서 그래요. 왜 우리들은 신경안써주시고 저쪽만 신경쓰는거죠?』
『..............』
『선배 혹시 저쪽 조에 좋아하는 사람있어요?』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저쪽은 이불이 하나도 없어서 떨고있고,
이쪽은 이불이 많길래 하나를 갖다 주었을뿐인데.... 난 후배의 톡 쏘는 공격에
말문이 막혔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금방 대답이 튀어나오질 못했다.


『혹시 저쪽 조의 은희 좋아하세요? 그래서 일부러 이불을 갖다주신거 아녜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몰아치던 그녀를 보면서 마음에 차오르던 그 촉촉한건 무엇이었을까....
그때 그렇게 쏘아붙이던 그녀의 입술이 얼마나 귀여워보이던지....
그리고 나를 향해 원망어린 눈망울을 담고 있던 그 눈이 얼마나 특별하게 보였던지......(^-^)
난 그때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왜 너랑 같은 조인줄 아느냐고.....
내가 학생회 간부빽을 사용해서라도 얼마나 너랑 같은 조가 되고 싶어했는지 혹시 아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걸 간신히 삼켰다.

그때 나를 원망했던 그 후배는 내 친구랑 같이 다니고 있었다.
난 겉으로는 둘을 축복해주었고, 속으로는 둘사이가 깨어지길 천지신명께 기도했다.
내 기도가 통했는지 친구가 군대에서 말뚝 박는 바람에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후 어느 동문 결혼식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볼 수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녀와 조용히 커피를 한잔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다...(^^)』
『녜. 선배도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 듣기로는 학원강사한다고 하는것 같던데....』
『녜.... 그렇게 됐어요』
『돈도 많이 번다고 하던데.... 밖에 있는 저 차 니꺼지?』
『어머 아셨네요... 호호호... 돈은 적당히 벌구요 재미있어요... 아이들하고 노느라 정신없어요(^^)』



그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커피를 스푼으로 젖다가 말다가,
홀짝홀짝 마시다가 말다가, 창밖을 보다가 말다가....
그렇게 약간 바람소리를 듣고나서 다시 말을 꺼냈다.



『너 그때 엠티때 기억나? 이불때문에 내가 너한테 엄청난 눈총받았던거...』
『어머 선배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때 제가 얼마나 섭섭했다구요....
의지하고 있던 선배가 다른 조 여자얘들만 챙겨주시고.....』
『짜식 그때 니가 흘겨보던 그 눈이 얼마나 무서웠다고... 사실은 말야....』


다시 우물쭈물하는 시간.... 아마도 난 그때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도 몰랐던 거 같다.
그냥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고나할까....
오랜만에 만난 후배에게 갑작스런 마음을 털어놓기도 그렇고....
아닌척 하면서 가볍고도 산뜻하게 마음을 알아채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미리미리 고민좀 하고 나오는건데 후회가 됐다.



『아참 선배... 저 할말이 있어요』
『응 뭔데 말해봐....(^-^)』
『저 지금 사귀는 사람 있거든요... 나중에 제 결혼식에도 꼭 오시는 거예요...』
『.................(^------^)』
『꼭 오셔야해요 선배 알았죠?』
『근데 너 일이랑은 헤어졌다 그러던데...』
『그건 그렇게 됐어요...』
『그럼 지금은 다른 사람? 그렇구나...... 결혼은 언제....?』
『당장은 아니구요... 연락드릴테니 꼭 오셔야 해요 알았죠 선배?』
『그러엄 누구 결혼이라고 당연히 가야지.... 꼭 연락해라......................................(^-------------^)』





커피를 타고 커피를 젖고 커피를 마시다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떠오르며 커피맛을 잊게 만든다.

이따금씩 ......... 생각난다.
처음만난 그때, 17년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무작정 손을 잡고 미친 듯이 캠퍼스를 한바뀌 달려보고싶다.
그녀 앞에서 마구 고동치는 내 심장소리만을 들려주고싶고
내 앞에서 마구 고동치는 그녀 심장소리만 듣고싶다.

내 어떤 말보다, 내 어떤 양복이나 구두보다 더
솔직한 내 심장소리를 들려주었더라면.....
하는 너무도 소박한 아쉬움이 오래도록 남는다.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chonwoun
2008.01.11 20:49
괜찮은 시높시스? 시나리오로 만들어도 괜찮겠는데요. 이런거 저런거 던져 넣어보고 등등.
Profile
sandman
2008.01.23 15:11
불교의 한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개울을 건너는 데..여자 한명을 업어준 스님과
그렇지 않은 스님 이야기..

그것이 추억인지.. 미련인지는 참 애매하네요...
이전
55 / 69
다음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