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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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하얀종이

ty6646
2008년 03월 29일 02시 03분 41초 1734 2
내가 초등학교때 좋아했던건 선이 그어지지 않은 하얀색 종이였다.
아무런 선도, 그림도, 도형도 없는 그냥 하얀색 종이가 좋았다.
하얀색 종이를 앞에두면 내 머릿속에선 무궁무궁진한 상상의 세계가 피어올라간다.
주체하기도 힘들만큼의 뚜렷한 형체와 색체를 가진 상상속의 세상이 내 머릿속에서 굴러간다.
그러면 난 보이는 그 모습을 그대로 따라 그려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땐 하얀색 종이가 귀했다. 기껏해야 똥색종이, 그것도 없을땐 치라시 이면지가 전부였다.
온갖 광고가 인쇄된 치라시의 이면지라도 듬뿍 받아들었을땐 잠도 못이룰만큼 행복했다.
저 이면지에 내일부터 온갖 그림을 다 그리리라... 어린시절의 나는 이면지를 안고서도 행복했었다.

그러나 입시지옥에 파묻혀 영수국외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운동회와 소풍이 사라졌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미술, 음악, 체육 수업이 사라졌다.
그래서.... 올해 39인 내게 남는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모든 것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때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었고, 그런 상실의 시간속을 무려 20년동안 헤매고 다닌 지금
난 아무것도 가진게 없음을 깨닫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좋아졌다.
국영수를 전혀 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시작되었고,
눈처럼 하얀색 종이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하얀색 종이가 부담스러워졌다. 하얀 종이를 앞에두면 웬지 벽을 보고있는 듯한
답답함, 꽉 막힌 듯한 느낌, 그리고 정지되어버린 듯한 둔탁한 기분들.... 그런 기분들에 갇히게 된다.

내 머릿속의 세밀하던 촉수들이 전부 말라비틀어져 버린 듯한 그런 어른이 되고말았다.
하얀종이를 받아들면 이미 내 안에선 그림의 완성작이 펼쳐졌었는데,
지금은 무얼 어떻게 그려야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내가 무얼 그리고싶은건지
전혀, 아무것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내 손은 굳어져버렸다. 내 마음은 더이상 뜨겁지 않다.

하얀종이 뭉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버리고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 최대의 소원이었던 하얀 종이를 하얗게 비워둔채 그냥 버리는 만행을 매일같이 저지르고도
난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그렇게 갖고싶어했던 하얀종이들이 꾸겨지거나 더럽혀져서 버려진다.





그래서 아이들을 늘 관찰하고 물어봐야한다.
아이가 무엇을 할때 가장 즐거워하고 무엇을 가장 하고싶어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때 잠도 못잘만큼 두근거리고 행복해하는지를 어른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의무가 있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총기를 들려주는 만행만큼
그림을 그리고싶어 미칠 것 같은 아이에게 있어 미술수업의 소멸이 얼마나 커다란 상처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어른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거나 일러주기 전에
우선 아이를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아이가 소심해서 감히 국영수대신 그림을 그리고싶다고 말하지 못할때
어쩔수없이 입시공부에 매달리면서 그리고 싶어 미칠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고만 있을때
어른이 내미는 손은
벼랑끝에 몰려 떨어질 순간에 처한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과 같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피겨스케이트의 김연아에게 피겨는 대학에 가고나서 해... 라고 한다면 말이 되나
영화하고픈 아이에게 영화는 대학에 가고나서 해...
그림그리고픈 아이에게 그림은 대학에 가고나서 해...
노래하고픈 아이에게, 연기하고픈 아이에게, 축구하고픈 아이에게... 대학에 가고나서 해...
라고 한다면 말이 되나...


시대가 바뀌었다. 대학은 언제라도 갈 수 있지만
무언가를 하고싶어하는 열정은 언제나 생기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하고싶어하는 열정을 가진 당신... 지금 당장 하라. 그 누구의 눈치도 볼거없다.
결국 후회하는 사람은 본인이다. 부모님의 말씀에 10년, 20년후의 당신을 걸진마라
하고싶어하는 당신만의 열정, 거기에 당신의 10년, 20년, 30년을 걸라...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moosya
2008.03.31 05:25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진정 창의적일 수 있다' 란 말이 떠오르는군요.
흰종이에 그릴 것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자유로울 수 없는 조건에 놓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날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힘차게 날개짓을 하며 치받혀 올라갈 공기가 희박하다고나 할까요.
다시 그 날개짓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doggy4945
2008.03.31 18:54
글이 너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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