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촌년 10만원

sandman sandman
2009년 06월 19일 01시 10분 26초 3019 4
촌년 10만원

여자 홀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판사 아들을 키워낸 노모는
밥을 한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에 가슴 뿌듯함과
오뉴월 폭염의 힘든 농사일에도
흥겨운 콧노래가 나는 등 세상을 다 얻은 듯 해
남부러울 게 없었다.


이런 노모는 한해 동안 지은 농사 걷이를 이고 지고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한복판의
아들 집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제촉해 도착했으나
이날 따라 아들 만큼이나 귀하고 귀한 며느리가
집을 비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부자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택에 촌노의 눈에 신기하기만 한 살림살이에
눈을 뗄 수 없어 집안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뜻밖의 물건을 보게 되었다.
그 물건은 바로 가계부다.

부자집 딸이라 가계부를 쓰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를 보고 감격을 해
그 안을 들여다 보니 각종 세금이며 부식비, 의류비 등
촘촘히 써내려간 며느리의 살림살이에 또 한 번 감격했다.

그런데 조목조목 나열한 지출 내용 가운데 어디에
썼는지 모를 '촌년10만원'이란 항목에 눈이 머물렀다.
무엇을 샀길래 이렇게 쓰여 있나 궁금증이 생겼으나
1년 12달 한달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날짜에 지출한 돈이

바로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용돈을
보내준 날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촌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 아들 가족에게 줄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지고 간 한해 걷이를
주섬주섬 다시 싸서 마치 죄인된 기분으로 도망치듯
아들의 집을 나와 시골길에 올랐다.
가슴이 터질듯한 기분과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분통을 속으로 삭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금지옥엽 판사아들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 왜 안주무시고 그냥 가셨어요”라는 아들의
말에는 빨리 귀향 길에 오른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이
한가득 배어 있었다.
노모는 가슴에 품었던 폭탄을 터트리듯
“아니 왜! 촌년이 어디서 자-아”하며 소리를 지르자
아들은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노모는 “무슨 말, 나보고 묻지 말고 너의 방 책꽂이에
있는 공책한테 물어봐라 잘 알게다”며 수화기를
내팽기치듯 끊어 버렸다.
아들은 가계부를 펼쳐 보고 어머니의 역정이 무슨
이유에서 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싸우자니 판사 집에서 큰 소리 난다
소문이 날꺼고 때리자니 폭력이라 판사의 양심에 안되고
그렇다고 이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태 수습을 위한 대책마련으로 몇날 며칠을 무척이나
힘든 인내심이 요구 됐다.

그런 어느날 바쁘단 핑계로
아내의 친정 나들이를 뒤로 미루던 남편이
처갓집을 다녀오자는 말에 아내는 신바람이나
선물 보따리며 온갖 채비를 다한 가운데 친정 나들이 길
내내 입가에 즐거운 비명이 끊이질 않았고
그럴 때마다 남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하기만 했다.

처갓집에 도착해 아내와 아이들이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모두 집안으로 들여 보내고 마당에 서 있자
장모가
“아니 우리 판사 사위 왜 안들어 오는가”,
사위가 한다는 말이

“촌년 아들이 왔습니다”
“촌년 아들이 감히 이런 부자집에 들어 갈 수있습니까”
라 말하고 차를 돌려 가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 시어머니 촌년의 집에는 사돈 두 내외와 며느리가
납작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며 빌었다.
이러 한 일이 있고 난 다음달부터 '촌년 10만원'은
온데간데 없고

'시어머님 용돈 50만원'이란 항목이 며느리의
가계부에 자리했다.
이 아들을 보면서 지혜와 용기를 운운하기 보다는
역경대처 기술이 능한 인물이라 평하고 싶고,
졸음이 찾아온 어설픈 일상에서 정신을 차리라고 끼얻는
찬물과도 같은 청량함을 느낄 수 있다.


.
.
.
.
.


^^

퍼왔음다...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pearljam75
2009.06.26 00:31
휴... 좋은 며느리는 될 수 없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고 하고 싶네요.

근데
고부관계란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극단적인 에피소드 이외에는... 거의 입장차이인 것 같아요.
박완서의 단편 <촛불 밝힌 식탁>은 같은 아파트 마주보는 동에 사는 부모와 아들내외 이야기인데요,
시골서 살다가 은퇴후 자식 근처에 살고 싶어서 서울로 올라온 부부가
저녁마다 아파트 건너편 동 건물 아들네 집에 불이 켜지면
얘들이 퇴근해서 집에 왔구나싶어 맛있는 것도 해서 갖다주고 손주들도 자주 보러가고 했는데.
어느 날 부터 불이 아주 늦게 켜지거나 아예 켜지지 않더랍니다.
알고보니, 아들내외가 시부모의 잦은 방문이 귀찮아져서 퇴근후에도 인기척을 내지 않기 위해
촛불을 켜고 소곤거리며 살기 시작했다나 뭐라나, 그런 내용인데,
그 아들 내외를 썅년놈들이라고도 할 수있지만 (박완서 할머니 세대는 당근)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잘해주셔도 귀찮고 어렵고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이 김수현 드라마에 나오는 것 처럼 대가족으로 와글 와글 모여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게 꼭 행복한 가족의 형태도 아니고요. 그 며느리 삼시 세끼 밥상 차리느라 돌아버릴 지경인데,
밥 안 차리면 썅년 되는 분위기, 그건 아니잖아요. 순종적인 며느리상 강요하는 거 싫어요.)

윗세대는 이제 그만 자식들 위해서 살지 말고
자기 인생을 즐기며 사는 스킬이 필요한데
우리네 어머니들은 워낙 이타적이고 희생정신이 강하셔서
그렇게 살지 못했고
그런 빡세고 희생적인 삶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하면
서럽기만 하고 속이 터지는 것이겠죠.

이제 인생의 꺽은선 그래프에서 하향중인것 같으니
자애스러운 시부모는 되지 못해도 괴물은 되지 말자, 생각해봅니다.
Profile
kinoson
2009.06.26 16:31
그게 참...쉽지가 않죠..
hermes
2009.07.01 13:27
우리는 이미 괴물.
Profile
iilloo
2009.07.10 11:50
서로 지혜롭게 대처는 했으나,,,,
진정으로 시어머니를 그후에 며느리가 대했을지는 의문이네..
이전
6 / 69
다음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