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서의 순정

pearljam75 2005.08.24 00: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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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내내 냉장고 문앞에서 알짱거렸다.

포도 한 송이, 천도 복숭아 2개, 비타500, 떡볶이, 튀김 2개, 너무 단 과자들,
그래도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

마를린 맨슨을 틀어놓고 먹다 남은 굴비, 식은 계란말이에 역시 마시다 남은 가시오가피 술 한 병, 혼자
홀짝 홀짝 마셔가며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평소 냉장고엔 고추장만 있는데... 몇달에 한번 쯤, 엥겔계수가 급상승하는 날이 바로 오늘인 듯 싶다.)

뭔가를 계속 집어먹으며 ... 토마스 하디' 소설들 속의 인물들을 생각했다.
라스 폰 트리에와 다를 바 없다. 존나 비극적 운명의 희생량들. 지금의 나와 다를 바 없다.

원래 폭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은 아닌데.
요 며칠... 그의 문학에서 너무 자주 보여지는 막가파적 회의론이 나를 잡아먹는 듯 하다.

<빌리 엘리어트>를 틀어놓고 다시 보다가 ...생각이 났다.
황우현 대표님이 강의하러 오셨다가 이메일 주소 적어주시면서 그랬었지.
<빌리 엘리어트> 너무 좋아해서 메일 주소가 이래요...

나는 스물 여덟에, 마누라와 딸아이가 있는 무용수를 알고 있다.
그는 물론 빌리 엘리어트적 인물은 아니다.
가난한 탄광촌 아이, 천부적 재능을 발견하고 가난한 그의 아버지는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파업 철회를 하고 아들래미 뒷바라지? 아니, 그는 꽤 사는 집안 아들이었고
고등학교 때까지 너무 놀아서 문제가 심각했는데 대학을 보내려는 그 부모의 노력 끝에
무용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물론 대학에 들어가서도 계속 놀았다.
하지만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더니 어느 날 정신을 차렸다.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나이트도 끊고...
여전히 일상대화에서 조차 어휘력은 참 많이 딸리지만 그는 정말 열심인 무용수가 되었다.
유럽이나 미주로의 진출을 계획하다 그의 아버지의 금고도 바닥이 보였는지 그는
한국에 주저앉게 되었는데 이제 그는 딸아이의 분유값 걱정을 하게 될 시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용은 정말 열심이다.
너무 너무 어휘력이 딸려서 의사소통이 잘 안되던 나는 짜증을 많이 부렸고
작년까지는 은근히 -때로는 티를 내면서까지- 그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올해 그의 공연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일취월장!!!

두터워져만 가는 아줌마 팔뚝과 점점 부피를 더해가는 나의 뱃살들이 쪽팔릴만한
아름답고 견고한 근육을 매달고 섬세한 동작을 펼치는 그의 공연을 보고 나는 반성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내 시나리오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렇게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몸도, 혀가 할 수 있는 어휘는 부족하나 다른 근육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몸짓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므로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판이나 무용판이나 각종 음악판(대중음악, 독립?음악, 클래식)이나...
쉬운 곳은 한 군데도 없고 쌈마이는 어디나 있다는 생각... 해본다.

하여간...
내가 처자식이 있다면, 부양가족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춤추는 걸 너무 좋아하게 된 그 무용수처럼
영화를 계속 할 수 있을까?

이런 의지는 혹시... 발목 잘릴때까지 춤추려는 '분홍신'같은 어긋난, 마약같은 욕망은 아닐까?

회의가 든다.

힘들어도, 힘들어도, 힘들어도, 할 수 있습니까?... 라는 JEDI님의 질문에
곰곰 어떤 대답을 해야하는가 고민 많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