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 영화역사
26 개

소비에트 학파

venezia70
2005년 01월 13일 13시 30분 43초 414071
소비에트 학파
(Soviet Cinema School)






1. 소비에트 학파의 배경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후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영화 제작과 배급체계 역시 새로운 정부의 목적에 봉사하는 실질적인 생산을 위해 엄격히 통제되기 시작하였다. 사기업을 포함한 모든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는 당국의 조치에 많은 개인 제작사들은 저항했고 정부 관리 아래 운영되는 극장에 대한 영화 공급을 중단해버렸다. 하지만 1918년 7월에 국가 교육 위원회 영화분과는 생필름의 공급을 엄격히 통제해 버렸고 그 결과 제작자들은 자체적으로 생필름을 비축하거나 기재를 챙겨 국외로 빠져나갔다.

1921년에 러시아는 방대한 기근을 비롯하여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생필품의 생산과 배급을 위하여 레닌은 몇 년 동안 사기업을 운영을 허용하는 신 경제 정책(NEP)을 시행했다. 그러자 영화의 경우 해외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제작자들이 보유하고 있던 생필름들과 기재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닌과 스탈린은 영화의 선동적이고 교육적인 힘을 잘 알았다. 1922년 레닌은 ꡒ모든 예술 가운데 우리에겐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ꡓ 라고 선언하였는데, 특히 무성영화의 경우에는 대중들의 상당수가 문맹이고 서로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현실에서 교육을 위한 이상적인 시각 매체였다. 정부가 처음에 지원한 영화들은 1922년 5월에 시작된 베르토프의 뉴스 연속물인 <키노 프라우다>와 같은 뉴스 영화들이었고, 이는 ꡐ선동 열차ꡑ라고 불린 형태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상영이 이루어졌다. 우연히도 다수의 소비에트 영화 감독들은 바로 이 시기부터 그들의 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1919년 국립 영화학교의 설립은 소비에트 학파의 성립과 무한한 영화적 실험을 가능하게 했다.

사실 이러한 실험은 영화에만 독자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혁명의 영향은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실험적인 요소를 권장하였다. 이러한 실험의 기원은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을 언어에 적용했던 1912년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약간 수정을 거쳐 혁명 이후의 구성주의 운동으로 변화한다. 유럽 모더니즘 예술의 추상적 형식에 영향을 받은 이 혁명 이전의 운동은 기술에 대한 신뢰와 고정된 의미의 제거에 노력하였다. 혁명 이후 구성주의자들은 과학 기술에서 변화의 엄청난 잠재력을 보면서 새로운 질서를 옹호하였고 그 질서 속에서 예술과 과학과 기술이 노동자, 예술가, 지식인과 협력하여 새로운 비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생산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이같은 새로운 인식은 새로이 출현한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에 쉽게 포용되었고, 모든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고 하는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확산하고자 했던 정치적 당면 과제와도 훌륭히 들어 맞았다.

2. 소비에트 학파의 경향

소위 소비에트 영화의 아버지는 자신의 몽타쥬 이론을 제시한 레프 쿨레쇼프이다. 쿨레쇼프의 이론은 각각의 쇼트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맥락에서 도출되며 그 쇼트를 다른 시퀀스에 둠으로써 그 맥락이 변하면 쇼트와 시퀀스의 전체 의미도 변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충돌과 갈등이 모든 시각적이고 영화적인 기호들에 내재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즉 영화의 쇼트는 앞 뒤에 오는 쇼트들과의 관련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이 쇼트들의 충돌이 관객의 마음 속에서 제 3의 의미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텅빈 테이블에 앉아있는 가난한 여자와 아이 쇼트들 사이에 먹을 것으로 가득찬 테이블에 앉아있는 자본가의 쇼트를 삽입하면 이것은 관객의 마음 속에서 자본가 계급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억압으로 읽힐 것이다.

쿨레쇼프의 몽타쥬 이론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세볼로프 푸도프킨, 알렉산더 도브첸코 등과 같은 동시대의 영화 감독들에게 엄천난 영향을 주었다. FEA(Factory of the Eccentric Actor)를 형성했던 감독들은 쿨레쇼프의 몽타쥬 체계로부터 소외 효과의 원칙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들은 낯선 맥락에 사물이나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서 관객을 소외시켜 이미지의 의미를 관객이 곰곰히 생각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모든 젊은 감독들이 몽타쥬 방식에 대해 꼭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푸도프킨은 쇼트가 벽돌과 같아서 씬이나 시퀀스를 이루기 위해서는 함께 합쳐져야 한다고 믿었던 반면, 에이젠슈타인은 최대의 몽타쥬 효과는 쇼트들이 서로 완벽하게 조응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 쇼트들이 관객에게 충격을 줄 때 얻어진다고 말하며 이를 반박했다. 에이젠슈타인에게 몽타쥬는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고하게 하는 지적 몽타쥬를 의미했는데, 그는 인간들을 사물이나 다른 살아있는 형식들과 상징적으로 대비시킴으로서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영화 <파업(1925)>에서 소 도살자는 파업자들을 학살하는 자들과 상징적으로 대비된다. 에이젠슈타인은 성격화를 회피하는 대신 그가 ꡐ전형화 typageꡑ 라고 불렀던 상징적 표현들을 택한다. 따라서 배우는 단지 영화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노동 계급 전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베르토프는 그들과 달리 기록영화적이며 사실적인 형태를 띤 ꡐ카메라의 눈ꡑ 방식을 선호하였다.

소비에트 학파의 이러한 몽타쥬 실험의 시기는 1925- 33년으로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쇠퇴하게 된 주요 원인은 러시아 정부의 정서적 통제가 몽타쥬 양식의 사용을 억제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에이젠슈타인과 도브첸코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난해한 방식을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스탈린 통치하의 러시아 정부는 모든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영화를 장려하였다. 그래서 모든 양식적 실험이나 비사실적인 주제는 비판되고 통제되었다. 소비에트 몽타쥬는 베르토프의 <열광(1931)>과 푸도프킨의 <도망자(1933)>와 같은 작품의 개봉을 마지막으로 1933년에 끝이 낫다고 할 수 있다.

3. 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알렉산더 도브첸코

교육받지 못한 농가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도브첸코의 영화에는 마르크스주의적 색채와 그의 무성영화를 다른 소련 영화 감독들과 구별되게 만드는 특이한 이민족적이고 신비한 요소들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몽따쥬는 다른 감독들에 적용되었던 것처럼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몽타쥬를 사용하는 방법은 매우 달랐다.

그의 중요한 세 편의 무성 영화 - <즈베니고라(1928)> <무기공장(1929)> <대지(1930> - 에서 긴 시퀀스들은 원형의 구조를 이루며 그들 자체로서 이상할 만큼 완전하여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는 씬 안에서 쇼트들의 관계보다는 시퀀스 안에서의 씬들 관계를 강조하였다. 수많은 다양한 씬들은 짧은 경향이 있으나 그 안에 포함된 쇼트들은 종종 길게 지속된다. 또한 대조적이고 생략적인 결합은 매우 예외적인 분위기와 진술의 추이를 이끌어 낸다.

그의 초기 영화에 일관되게 흐르는 의도는 명백히 시적이다. 그러나 그의 상징과 은유들은 강요되거나 순문학적이진 않은데, 그것들은 인간과 흙이 친밀하다는 착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전체로서의 인생을 보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선전선동은 없다. 그를 가장 강렬하게 끌어당긴 것은 편집자들의 가위질에 의해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포착할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 이었다.

2) 세볼로프 푸도프킨

푸도프킨은 쿨레쇼프의 자연주의적 성격화와 몽타쥬 원칙에 따라 대중적인 내러티브 영화들을 제작하였다. 쿨레쇼프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는데,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몽타쥬의 잠재력을 연구하는 쿨레쇼프의 일련의 실험들을 같이 했다. 푸도프킨이 쿨레쇼프보다 더 위대한 감독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스승의 통찰력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이론서들 -<영화 기술><영화 연출> - 을 저술하기도 했다.

푸도프킨은 주요 무성영화들 - <어머니(1926)> <성 페테르스부르그의 종말(1927)> <아시아의 돌풍(1928)> - 에서 그가 터득한 것들에 대한 완전한 형식을 부여하였다. 푸도프킨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감정과 독립된 정체성을 갖는 개인들이며, 그의 플롯 구성은 러시아의 혁명적 상황 속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헐리우드 영화의 선악 대결 구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의 영화들은 에이젠슈타인의 고도로 지적인 호소와는 달리, 즉각적인 갈채를 받고 우리의 정서 깊숙한 곳으로 침투한다. 또한 그의 영화의 힘은 몇 해가 지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듯하다.

3)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에이젠슈타인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강렬한 관심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후에 영화에 대한 그의 심오하고 박식한 이론의 내용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상형문자에 매혹되었는데, 도출된 두개의 상징이 결합하여 영화의 쇼트들처럼 제3의 다른 의미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첫 장편 극영화 <파업(1925)>은 공장을 배경으로 한 노동자들이 집단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이다. ꡐ군중의 몽타쥬ꡑ는 이제 놀라운 시각적 대조와 물리적 영향력을 지닌 쇼트들과 함께 빠르고 리듬감있게 편집되었다. <전함 포템킨(1925)>은 현란스러움을 없애고 풍부한 상상력을 단련시킴으로서 그의 첫작품보다 진보하였다. 이 영화는 꽉짜인 견고한 극적인 방향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작품을 구성하는 다섯 시퀀스는 고전 비극의 일련의 막들이 축적해 가는 힘을 가지고 진행된다.

에이젠슈타인은 언제나 운동성을 통해 작품을 만든다. 그러나 프레임 안에서의 움직임의 양과 편집의 신속함이 부가되기 때문에 카메라의 움직임은 거의 없다. 대신 그의 편집 방법이 요구하는 대로 상당수의 카메라가 다양한 공간에 배치된다. 최고조로 극적인 행동의 순간에는 각 쇼트들의 두 프레임 정도로 짧고 그 내용은 때때로 공포스러울 지경이다.

<10월(1928)>은 그의 가장 뛰어난 성과들 중 어떤 면, 즉 그의 ꡐ지적 몽타쥬ꡑ의 수준에 올라있기는 하지만 너무 스케일이 커서 그 기념비적인 의미가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해될 뿐이었다. 이후 그는 내용보다 형식에 집착한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수치를 당했으며 자신의 이전 행위들을 비난하도록 내몰린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이론적 글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여전히 영화 이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참고 문헌]

1. 세계 영화사 (잭 C. 엘리스/ 변재란 역) - 이론과 실천
2. 영화 예술 (데이비드 보드웰, 크리스틴 톰슨/ 주진숙, 이용관 역) - 이론과 실천
3. 세계 영화 기행1.2 (조재홍 외) - 거름
4. 영화 사전 - 이론과 비평 (수잔 헤이워드/ 이영기 역) - 한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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