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수선

vincent 2001.11.20 04:05:04
스필버그의 <아미스타드>나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나왔을 때,
이런 기분일까.
의욕과잉의 도전기를 보는 느낌.
모든 과한 것들이 그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녹아 섞이고
다시 현실의 냉기에 닿아 제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굳어버린 그런...

역시 발견하게 되는건,
50년을 지켜온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그것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라는 생명과 이념과 선택이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공간을 '그저' 거쳐왔건, 몇 명의 가슴에 칼을 박고 총알을 박아넣은 연쇄살인의 고리들을 '느슨하게' 꿰어냈건...
그 시간과 사건 사이를 '과도한' 에너지를 분출하며 뛰어다니는 탐색자의 눈을 통해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결국 굳이 마지막 장면에 끼워넣은 바위틈을 뚫고 피어난 들꽃.

배창호감독의 궤적을 머리속에서 지우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덜컥거리는 이 영화가 애처로울 수 있는건,
이 영화의 그 모든 결격사유들이 마음 아픈건,
오로지, 배창호감독의 '진심'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래도 이 영화에 대해 애정을 거두지 못하는건
이 영화가 배창호감독이 만든 '대중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가 여전히 '배창호표 영화'이기 때문이다.

<흑수선>이 회귀? 아니, 나는 다시 <러브 스토리>와 <정>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것이 기다려진다.
신입들이 온전히 해내기 힘든 일, 중견이 지켜주어야할 자리는 오히려 그 곳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