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로드 - 현실 속에 매몰된 슬픈 아이러니 -

sajahoo 2009.05.09 02: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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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에 매몰된 슬픈 아이러니...

1950년대 미국의 시대상과 맞물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빚어낸, 한 중산층 가정의 붕괴...
이 영화는 이 이야기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

화려한 뉴욕 도심의 밤거리...그리고 떠들썩한 파티장의 군중들...
그 속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첫 만남을 갖는 남녀 주인공.

영화는 첫 장면부터,
사람들이 “현실”이라는 울타리를 망각하는데 가장 쉬운 상황과 장소를 장치해 두고 그 속에서 서로 가치관이 맞지 않는 남녀를 이어주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은 서로 호감을 느끼고 빠져들지만...
사실 이들의 사랑이 이내 난관에 봉착하리라는 걸, 감독은 여러 장치를 통해 관객에게 친절히 전달하고 있다.

서로의 “일”에 대한 물음에, 배우수업을 받고 있다며 ‘이상’을 이야기 하는 에이프릴과 부두에서 일 한다며 ‘직업’을 이야기 하는 프랭크 사이의 간극도 그러하거니와,
“ 제 말은, 직업을 물어본 게 아니라 어떤 일에 흥미가 있죠? ” 라는 에이프릴의 질문에 이은 프랭크의 의미 없는 대답은,
꿈과 이상을 중시하는 (그녀)에 비해 현실에 매몰된 (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어진 댄스 장면에서의 에이프릴의 뭔가 불안한 눈빛과 두 사람의 교감의 부조화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뇌리를 맴도는...어쩌면, 이들의 미래를 예단케 하는 “덫”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낭만”은 이 2분여에 불과하다.

파티 장에서 현재의 연극 공연장으로의 공간적 이동도 그러하거니와, 프랭크의 눈빛이 로맨스에서 매너리즘과 공허함으로 옮겨지며 낙담한
에이프릴의 눈빛과 교차되는 것도 그야말로 한 순간이다.
마치 자이로드롭이 낙하하듯, 낭만에서 현실로의 처절하리만큼 빠른 전환은,..
흥미롭게 <타이타닉 커플의 11년만의 재회>를 기대하며 스크린을 주시했을 많은 관객들을 향해 감독이 던지는 진지한 [ 큐-사인 ]과도 같았다.

그렇게 차가운 현실 속에 내던져진 영화는, 이내 두 사람의 갈등을 야기하며 주제를 향해 무서우리만치 묵묵히 몰입해 간다.

사실, 이들 부부가 살고 있는 집과 동네는 이들이 탈출하고 싶어 하는 현실을 상징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다.
조용한 동네의 하얗고 아담한 집과 바다, 수풀이 우거진 아름다운 산책로...
이들 부부는 이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탈을 꿈꾸는 것이다.
(특히, 아름다운 산책로는 이들이 가장 강렬한 갈등을 일으키는 장소로 부각된다)

영화는 이러한 슬픈 아이러니를 많이 장치해두고 있는 듯하지만, 결코 조급하게 드러내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묵묵히 흘러갈 뿐이다.

“파리” 라는 도시로 상징되는 에이프릴의 현실도피를 위한 욕망과,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다면 구분해내지 못 했을 정도로 획일적이었던) 무표정한 출근길 중절모 행렬과 컴퓨터라는 문명의 이기 속에 매몰된
프랭크의 현실 안주...
 
이들의 평행선은, 함께 이탈을 꿈꾸던 잠시간의 달콤함을 뒤로 한 채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단초가 되고 만다.
그리고, 프랭크에게 자기 방어적인 현실 안주를 강요하는 것도, 다름 아닌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현실인식 이었으니...
관객에게 던져지는 질문. 혹은 과제 또한 냉철하기 그지없다.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게, 배우와 관객의 심리적 괴리를  빼곡이 채워주는 음악의 매력이다.
특히, 에이프릴이 프랭크의 친구 쉐프와 춤을 추는 장면과,
두 주인공이 한바탕 격렬한 갈등을 일으킨 후. 창가에 선 프랭크가 어둠 속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무는 에이프릴을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하다.

가정의 붕괴를 다루는데 있어, 중요한 구성원인 아이들이 화면에서 철저히 배제된 점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낙태 문제가 위태롭게 잠재되어 있던 갈등을 수면 위로 분화 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긴 하지만...)
그들 부부의 문제에 집중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반면, 처음엔 등장여부조차 다소 뜬금없었던 존(마이클 샤논)의 존재는 단 두 차례의 등장만으로도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결코 미치지 않은 듯한 독설로 냉철하고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정신과 환자 존.
이 세상은 미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이 들다는...세상을 향한 조소가 바로 그에게 담겨있는 듯하다.
미친 자가 가장 올바른 해답을 제시한다...이 영화가 던지는 또 하나의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화는 의외로 부동산 중개인 헬렌이 남편에게 던지는 말로 끝맺음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태도에서 벗어나 주인공 부부에게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는 그녀...
과연, 이 시대를 사는 그 누가 그런 그녀를 비난하고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녀의 말을 들으며 엔딩을 장식하는 그녀의 남편의 얼굴 표정...
그건 바로 지금을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누가 뭐래도 디카프리오와 윈슬렛. 이름 하여 타이타닉 커플의 11년만의 재회라는 사실은 이영화의 가장 강력한 대중적 무기다.
단순히 스타로서가 아니라 이제 헐리웃을 대표하는 어엿한 연기파 배우로 성장한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 역시 관객 입장에선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특히, 올해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이 영화로 주연상을, <더 리더>로 조연상을 동시 수상하고, <더 리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마저 휩쓸며 연기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맞고 있는 케이트 윈슬렛의 내면 연기는 그야말로 빛을 발한다.
한 배우의 가장 물오른 시점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지는 것이리라...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 또 하나 간과해선 안되는 게, 바로 감독의 정체성 여부다.

이 영화의 감독이 샘 멘데스임을 아는 순간, 영화는 더욱 특별해진다.
그가 바로 여주인공 케이트 윈슬렛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데뷔작인 [ 아메리칸 뷰티 ] 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그야말로 화려하게 등장한 그는, 그간의 작품에서 시종일관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미국 사회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같은 감독의 시선은 이 영화에서도 예외 없이 집요하게 표출되고 있다.

[ 아메리칸 뷰티 ] 감독의 연출작...이란 숨겨진 타이틀이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연출력이 유감없이 발휘됐음은 물론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영화 [ 레볼루셔너리 로드 ] 는 첫 장면부터 상당한 복선을 내포하고 있다.
앞으로의 예후를 감독은 여러 장치를 통해 관객에게 친절하고도 교묘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렇듯, 카드를 미리 오픈하고도 관객을 포커판에 몰입케 하는 연출의 솜씨는 주연배우들의 명연기와 어우러져 끊임없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 해답에 대한 고민은,
 
왠지모를 먹먹한 '여운'으로...
나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