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 영화역사
26 개

영국의 프리 시네마

venezia70
2004년 01월 08일 12시 20분 24초 409522
1. 프리 시네마의 배경

"프리 시네마"는 린제이 앤더슨이 1956년에 국립 영화 극장에서 상영하기 위해 자신이 기획한 일련의 다큐멘터리들과
단편 영화들을 설명 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이다. 1956-1959년에 여섯개의 프로그램들이 있었으며, 프랑스와 폴란드 작가의 작품도 포함한 이 영화들을 관통한 기본에서 만들어졌으며, 동시대를 비판한 이 영화들의 진술이 전적으로 개
인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강조 했으며 감독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표현되는 가치들을 위해 저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6년은 영국에 있어서 정치,문화적으로 중요한 해옇다. 결국은 실패하고 만 수에즈 운하에 대한 공격으로 대영제국의 오만이 실추되고, 그 결과로 정부 조직 전체의 신용이 떨어졌다. 그 체제 안에 존재하는 좌파 노동당 또한 집권 보수
주의자 만큼이나 과실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1956년은 소련의 헝가리 공격 등으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이 마침내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 해이기도 한다. 부분적으로 이런 사건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좌파"라는 젊은 세대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이론과 인민의 삶의 전체적인 질에 영향을 줄 사회의 기본적인 재조직화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어다.

이러한 시대의 정신으로부터 야기된 다양한 매체를 다르고 있던 예술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노동 계급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계급체계의 고정성과 불평등에 대한 그들의 공격적 태도로 말미암아 "성난 젊은이들Angry Young Mean"이라고
불리워 졌다. 존 오스본의 희곡<성난 얼굴로 돌아보라_1956>가 연극 무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을 시점으로
같은 시기 연극들은 모두 때때로 귀에 거슬리는 분명한 사회 비평과 하층 계급을 배경으로 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러한
종류는 문학(소설)을 거쳐 드디어 영화에 이르게 된다.

2. 프리 시네마의 경향

프리 시네마는 운동이라기 보다는 영화에서의 하나의 경향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첫째, 프리 시네마 프로그램
자체가 국제적이었고,당시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서 취사 선택하여 모아진 것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두번째, 국가적으로 보아도 프리 시네마 영화들은 소수의 영화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비록 그들이 공통된
이상을 공유하긴 했지만, 소위 이 운동을 창시한 린제이 앤더슨,카렐 라이츠, 토니 리차든슨의 작품을 제외한 다른 영화인들에게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들이 공유한 생각 가운데 두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머저 다큐 멘터리 영화는 모든 상업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둘째 이것들은 더욱 휴머니즘적이고 시적인 접근 방식을 가지고 만들어져야 한다는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프리 시네마는 존 그리어슨보다 1930년 험프리 제닝스의 다큐멘터리 전통으로부터 탄생했다.
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들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 생활과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그들의 믿음이다. 그들은 특히 노동 계급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저념하였다.

그리고 프리 시네마의 출현에 관련해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들이 1946년 앤더슨이 창간한 영화 비평지 <시퀀스>의 필자엿다는 것과 이 잡지의 글들로부터 프리 시네마의 기풍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잡지는 영국 다큐멘터리의 순응성 무감동에 대해, 그리고 장편 영화의 틀에 박힌 양식과 미학적 실험 부재에 대해 비판하였다. 애더슨과 라이츠는 자신들의 글에서 영화의 내용보다는 스타일을 연구하고 영국 영화가 고전 내러티브 영화에 집착하는 것에 개탄하였다.

앤더슨,라이츠, 리차든슨 이들 세 작가를 잇는 공통점은 이들의 작품이 개인과 집단에 초점을 맞초고 있다는 것과 편집에서 느리고 빠른 리듬의 병치를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재즈가 노동 계급 하위 문화의 한축 관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이들을 잇는 또다른 공통점은 그들의 영화 스타일의 연속성이다. 이것은 6편의 프리 시네마 영화 가운데 4편이 카메라맨 윌터 러셀리에 의해 촬영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1956년에 상영된 단편 영화는 앤더슨의<오, 꿈의 나라>.라이즈와 리차든슨이 공동 연출한 <엄마가 허라하지 않아요_1955>,로렌자 마제티의<함꼐_1956>였고, 그후 앤더슨의 <크리스마스를 제외한 모든 날_1957>,카렐 라이츠의 <래메스의 소년들_1958>을 끝으로 진정한 의미의 프리 시네마 운동은 단명하게 된다.

하지만 프리 시네마로 비롯된 1950,60년대 영국 영화는 영국 관객이 처음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유럽식의 자유
로운 개인 영화를 접할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젊은 감독이 영화계에 진출해서 영국 사회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토니 리차든스
프리 시네마의 중심 인물 중 가장 먼저 장편 영화를 만든 토니 리차든스은 존 오스본의 희곡<성난 얼굴로 돌아보라>를 1956년에 왕립 극단 공연으로 연출하여 각광 받았고, 1959년 동명의 작품을 장편 영화로 만들었다. 이 후에도 리차든슨과 희곡 작가 오스본으 공동으로 우드폴 프로덕션을 세우고, <연예인_1960><장거리 주자의 고독_1962>등의 사실주의 영화를 여러편 만들었다.

그의 1961년작 <꿀맛>은 쉘라 델라니가 쓴 희곡으로부터 나왔는데,복잡한 심리적인 관계들과 중산 계층의 존경할 만한 관습 안에서 존재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의 성취되지 않은 욕구들을 다루고 있으며,<장거리 주자의 고독>은 범죄에 빠져 감옥에 보내진 한 하층 계급 젊은이의 삶, 좌절된 야망, 원한을 그리고 있다. 재미있고 상당히 의미있는 리차든슨의 이런한 사회적 사실주의 장편 영화들은 특히 훌륭한 연기에 의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출발점인 사실주의 영화에서 멀어져 갔는데,<톰 존스_1963>는 필딩의 18세기 소설에 다소 충실한 작품이다.

2) 카렐 라이츠
단편 영화 제작 시절 부터 토니 리차든슨과 주로 같이 작업하던 카렐 라이츠는 사회적 사실주의 장편 영화들 중 단 한 작품만을 감독하였는데, 이 역시 리차든슨의 제작에 힘입어서 였다. 알랜 시리토의 대중 소설을 바탕으로 한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_1960>은 노동 계급의 반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작품으로 기록 영화적 의도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데, 그것은 상황에 가해지는 것보다는 오헤려 상황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이야기와 납득이 가도록 자연스어운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다. 주로 동료드의 작품을 제작하기만 했던 라이츠는 이 영화의 연출 이후로 사실주의 영화에서 멀어져 갔다.

3) 린제이 앤더슨

린제이 앤더슨은 비록 프리 시네마 집단의 지도자이며 대변인으로 인정되고 있지만,그들 중 마지막으로 장편 영화에 뛰어들었다. 데이비드 토리의 소설을 바타으로 하고 있는 그의 첫번째 작품인 <즐거운 인생 This Sporting Life_1963>
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적 사실주의 영하지만, 한편으로는 주관적 사실주의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7년 작<하얀 버스>에 이어 <만약_1968> 은 공립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동을 시적이고 폭력적이며 때로는 우습게 다룬 판타지물로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후 그는 <행복한 인간_1973><기념식-1974>등의 영화를 만들며 프리 시네마 정신을 시종일관 유지해 나간다.

후기작인<브리타니아 병원_1982><8월의 고래_1987>등도 주제와 배경 면에서 다르긴 하지만, 초기 영화들과 같은 사회적인 비판의 충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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