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이전(1923~1945)

venezia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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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6월 17일 16시 58분 09초 *.120.36.55
1. 개요

한국영화의 기점을 놓고 한국영화사는 혼란스럽다. 우선 기점의 출발이 영화의 전래부터인지 한국 영화의 태동부터인지의 관점이 정리되지 않았다. 한국 영화의 태동부터 기점을 언급하더라도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냐 김도산의 <국경(1922)>이냐 또는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1923)>냐가 명백치 못하다. 이 밖에 확인되지 않은 자료로도 연쇄극 <과거의 죄(1917)>가 있으며 또다른 차원에서 완벽하게 우리손으로 만들어진 한국영화를 기점으로 본다면 이필우의 기록영화 <조선여자정구대회(1924)>와 박정현의 <장화홍련전(1924)>이 있다.
어쨌든 1923-26년의 시기에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극영화가 등장하고 아울러 영화제작사가 발족하기 시작한다. 초기 영화제작사들은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해 한 작품으로 끝나고 만 예가 대부분이었는데, 영화를 잘 모르고 제작에 뛰어든 것에 불과했고 문화적 사명이나 참여 의식보다는 투기성을 띤 시도가 많았다. 또한 영화제작에는 경제적인 뒷받침과 기술 습득이라는 두가지 요소에다 인재 양성이라는 절대 요건을 갖추어야 되었음에도 모든 것을 일본에 의존하고 배워야만 했다.
영화 제작이 본격화한 후 1926-35년까지 10년간은 진정 흑백 무성영화의 전성기였는데, 1926년 9월에 발표된 나운규의 <아리랑(1926)>은 한국영화의 전환기를 마련한 작품이었다. <아리랑>은 일제하 우리 한국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영화라는 매체가 어떤 일을 담당하여야 하는 지를 여실히 가르쳐 준 작품이었다. 이 영화의 흥행으로 한국영화계는 활력을 갖게 되었고 다른 영화인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이 기간에 나온 작품 수는 80편에 달한다. 이는 해방 전 작품의 반 이상을 넘는 숫자다.
30년 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영화에도 발성영화가 등장하게 된다. 한국 영화의 최초 발성영화는 이필우가 녹음하고 그의 동생인 이명우가 촬영하고 감독한 <춘향전(1935)>이다. 이 작품을 만든 ‘경성영화소’의 발성영화 시대가 개막되자 한국영화계는 촬영소 시설을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메이저 시스템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발성영화의 시작은 엄청난 자본과 인원, 기술 개혁이 요구되는 한편 이에 따르는 뒷받침을 우리의 힘에 기댈 형편이 못되었던 때였기에 새로운 요구는 결국 제작의 위축을 뜻했다. 이러한 위축을 넘본 일본의 겨냥은 때맞춘 그들의 동양지배와 나아가서는 세계 대전의 망상을 버리지 못한 소용돌이와 겹쳐서 드디어 긴축과 통제 경제 속에 우리 영화계도 휘말리게 되어 서둘러 일본 일색의 영화, 특히 전쟁을 합리화하는 군부 지배하의 방향제시를 내세우는 데까지 이르고 만다. 따라서 우리 영화계는 일본의 지배하에 예속되었고 많은 인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백기를 겪게 된다.

2. 무성 영화 시기

연쇄극 시대가 가고 드디어 온전한 무성 영화가 도래하는데, 1923년 4월9일 우리나라 최초의 무성 극영화 <월하의 맹서(윤백남)>가 제작된다.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제작한 저축을 장려하는 극영화로,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필름으로 제작되었고 한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극영화이며 각본, 감독, 출연이 한국인이었다는 사실로 영화사적 뜻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무성 영화의 효시가 <월하의 맹서>보다 몇 달 전에 발표된 <국경(김도산)>이라는 설도 만만찮게 제시되고 있는데, 비록 필름이나 스틸 한장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기록으로 인해 제법 설득력있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24년 당시 유일한 조선인 극장주였던 단성사의 박승필은 한국 사람들만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취지 아래 단성사 촬영부를 신설하고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감독(박정현), 각본(김영환), 촬영(이필우) 등 스탭, 캐스트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로 구성된 최초의 영화였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우리에게 귀중한 경험이었고 순수한 우리 영화의 시작이었다.
극장이 늘고 관객층이 형성됨에 따라 제작사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영화 시장이 형성된다. 윤백남은 1925년 한국에서 첫번째 개인 프로덕션인 <백남 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심청전(1925)>을 첫 작품으로 내놓고, 비슷한 시기에 단성사 촬영부를 해체한 이필우, 이구영 등이 <고려영화 제작소>를 차려 <쌍옥루(1925)>를 개봉하여 흥행 성공을 하는 등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퇴폐적이고 유치한 통속소설을 윤색한 <쌍옥루(1925)><장한몽(1926)><농중조(1926)> 등의 영화가 주로 흥행하였으나, 이경손의 <개척자(1925)>는 이광수의 소설을 각색한 최초의 문예영화로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발아를 보여 줬다. 또한 이필우의 <멍텅구리(1926)>는 만화를 영화화한 최초 영화로 풍자적인 한국 희극영화의 출발이다.
1927년은 한해 동안 14편을 제작하여 해방전 최다 영화 제작을 한 기록이 남기도 했다. 우선 나운규의 <아리랑(1926)>의 등장은 영화사적으로 매우 의의가 큰데, 첫째. 민족적 사실주의 영화의 대두이다. 종래의 한국영화가 유치한 모방과 신파물을 벗어나지 못할 때, 농촌의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사실주의 영화형식의 창조와 일제에 억눌린 민족의 심리를 대변한 민족주의의 의식을 발아시킨 작품이다. 둘째, 영화의 개봉은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의 개봉이었다. 관객의 호응을 절대적으로 얻었던 <아리랑>의 흥행은 한국 영화산업의 개화를 촉구하였고 영화를 통한 조선인의 인식변혁이 시작되었다. 세째, 영화미학의 발전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아리랑>에서 보여준 몽타쥬나 사실주의 영상 감각은 연극 무대로부터 영화 예술을 탈피시켰다. 네째, 영화검열의 강화가 대두 되었다. “활동사진 필름 검열규칙”(1926)이 제정, 공포되어 1928년에는 강화 시행되었다. 홍개명의 <혈마(1928)>는 상영 금지된 최초의 작품이다.
이 시기에 나운규는 <나운규 프러덕션>을 창립하고 <잘 있거라(1927)><옥녀(1928)><사랑을 찾아서(1928)><사나이(1928)><벙어리 삼룡이(1929)> 등을 제작, 감독, 시나리오, 주연까지 맡았다. 나운규를 중심으로 황운, 홍개명, 심훈, 김상진 등 많은 영화감독들이 활동하였다. 특히 카프계의 영화 활동은 주목할만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였으나 미숙한 영화 기법과 사상 탄압의 검열로 개봉조차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였다. 김유영의 <유랑(1928)>, 강호의 <암로(1929)> 등 대표작이 있다. 카프계의 논란은 무성영화의 전성기를 쇠퇴시키는 요인으로 한국영화는 방향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그것은 영화 검열로부터의 회피이다.
우리는 무성영화 시대를 마감하면서 영화의 해설자인 변사를 기억해야 한다. 변사의 능력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했던 무성영화의 스타, 변사들은 나름대로 전문성을 갖고 비극과 활극으로 분류된다. 신파조의 목 쉰 목소리로 소설체의 대사를 읊었던 변사는 영화 해설 뿐만 아니라 효과음 그리고 영사기까지도 경우에 따라서 조작해야 했다. 일제의 검열은 변사의 자격증을 부여함에 있어서 그의 사상을 은근히 파악하였다. 그만큼 변사의 능력은 영상의 기능을 좌지우지 하였다.

3. 발성 영화 시대 개막

1935년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발성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녹음 기술을 위해 일본을 오가며 노력한 이필우의 연구와 공로의 결과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은 대사도 많지 않고 주제음악 및 배경음악도 양악을 사용하여 고전적인 내용과 일치되지 않는 등 기술적으로 허술한 구석이 많았지만, 당시 대단한 인기와 환영 속에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춘향전> 이후로 한국 영화계는 본격적인 발성영화 시대의 개막을 보게 되었다. 무성영화의 종말을 인식한 각 영화제작사들은 앞다투어 시설 근대화와 자본의 대형화를 계획하게 되었다. 기술 대혁신이 필요하게 되었고 연기자들도 실력이 없으면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 녹음 촬영이었으므로 연기자와 기술자 사이의 협력 체제가 절실히 필요했고, 이는 반사적으로 한국 영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아리랑 3 (1936,나운규)><나그네(1937,이규환)><심청전(1937,안석영)><오몽녀(1937,나운규)> 등이 모두 토키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그러나 막대한 제작비로 너나없이 모두 발성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던 제작자들은 당장 경영 압박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을 만들어 위세를 떨치던 <경성촬영소>마저도 <오몽녀>를 마지막 작품으로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자본으로 무성 영화의 몇배나 드는 발성영화를 경쟁적으로 만들었으니 영화계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사의 대형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영화주식회사><청구영화사><성봉영화사> 등 대형영화 주식회사다 설립되었다. 대형 영화사들이 설립되자 그동안 난립했던 중소 영화제작사들과 군소 프로덕션들은 자연 도태되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사 수가 줄어드니 제작편수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영화 일색인 흥행 현실에서 관객의 입장료는 일본 영화업자들의 배만 불릴 뿐이었다. 한국 영화계는 갈수록 위축되었는데, 한국영화사의 분기점이 되었던 발성영화의 등장이 역설적으로 영화계의 자본 사정 악화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4. 친일영화 제작 시기

일본은 1937년 <만주영화법>을 제정하여 만주국의 영화제작, 수출입, 배급과 상영을 일원화하였고 1939년에는 일본 문부성에 영화과를 신설한 후 <일본영화령>을 제정하고 1940년 <조선영화령>을 공포하기 1년 전부터 내선일체와 식민지 침략전쟁에 비협조인 영화인들을 내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38년에 만들어진 <군용열차>는 경향파 영화평론가였던 서광계의 변절로 일지사변에 편승하여 제작된 군국 어용 영화의 시작이었다. 1941년 조선영화제작협회와 조선영화배급협회의 결성은 1942년 조선영화제작자를 축출시킨 <조선영화주식회사> 발족으로 한국영화의 제작, 배급은 일본에 의해 완전 장악되고 한국영화의 암흑기는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 경향은 일제 하의 조선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거나 황국 신민으로서 일본에 협력할 것을 선동, 교화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최인규의 <집없는 천사(1941)><가미가제의 아들들(1945)>, 안석영의 <지원병(1940)><흙에 산다(1942)>, 방한준의 <승리의 뜰(1940)><거경선(1944)><병정님(1944)>, 신경균의 <우리들의 전쟁(1945)><감격의 일기(1945)>, 박기채의 <조선해협(1943)>, 허영의 <너와 나(1944)> 등이다. 반면에 전창근의 <복리만리(1941)>, 윤봉춘의 <신개지(1942)>는 일제의 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족의 계몽영화를 고집하였다.
1940년 이후 일본의 가혹한 억압은 한국 영화계를 꼼짝달싹 못하게 족쇄를 채웠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저력은 일본의 극악한 동원령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비록 암울한 시기이기는 했으나 인동초처럼 겨울을 지나 광복의 날을 맞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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