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렁한 대화

vincent 2003.07.12 08:19:49

[김영하의 길위의 이야기] 썰렁한 대화 1


길에서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게 되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갈 길은 바쁘고 서로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지만 그렇다고 안면 몰수할 수는 없다. 그럴 때를 대비해 명함이라는 게 있다.
명함은 아주 많은 대화를 함축하고 있다. 어디 다니느냐? 직급은 뭐냐? 전화번호는? 등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단 한 장에 요약해놓았다. 남자들은 학교에서 배우기라도 한 것처럼 헤어질 때는 전 국민이 똑같은 말을 한다.

언제 소주나 한 잔 하자.

명함이 없는 사람들은 약간 곤란하다. 할 수 없이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어제 버스에서 명함이 없는 두 이십대 여성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근 5년 만에 다시 만난 이 대학교 동창들. 그들은 대명사를 잘 활용하여 난관을 돌파하고 있었다.

너 아직 거기 살지? 아니, 방배동으로 옮겼어(거기가 어딘지는 이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영진이 결혼한 거 알지? 어, 결혼했어? 언제?(5분이 그걸로 지나간다. 그런 식으로 세 명이 더 거론된다). 드디어 화제가 떨어지자 한 명이 묻는다. 짧지만 울림이 강한 질문이었다.

너 전화번호 그대로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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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다른 영화 시사회장 앞에서 만난 A와 B,

A : (눈길 피하다 마주치자 반가운 척) 어어- 오랜만이네.
B : 와, 여기서 만나네요.
A : 어떻게 지내요?
B : 뭐 늘 그대로죠. A씨는 어떻게 지내세요?
A : 저도 뭐 늘 그렇죠. 요즘도 거기서 준비중이세요?
B : 예. 아 참, 그 때 그 작품 어떻게 됐어요?
A : (애 써 웃으며) 몇 달 전에 엎어졌어요.
B : 아 이거 참... 얼른 새 작품 준비하셔야죠.
A : (화제 돌리고픈 절박함에 뜬금없이) 아 참, C 소식 들었어요? 이번에 $$에서 준비한다던데.
B : 그래요? D도 거기서 준비한다던데.
A : D는 ##에서 준비하고 있지 않았나?
B : 그거 한 달 전에 정리했어요.
A : 아, 그럼 $$에서 그거 말고 딴 거 준비하는거구나. 음.. $$로들 많이 가 있네.
B : (시계 보더니, 20분이나 남았지만) ... 에구 영화 시작하겠네.
A : 아, 그렇네. 저기 그럼 다음에...  언제 소주나 한 잔 하죠.
B : 예, 전화 드릴께요. 아 참, 전화 번호 그대로죠?


알게 되면 부담(?)이 되고, 모르면 무심한 사람으로 찍힐 정보들을
잘도 요리조리 피해가는 과감한 생략기법과 대명사의 활용..
때로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화제로 놓고
반복과 변형으로 시간을 때우는 재치(?)까지..

나이가 들면서 늘어가는 것 몇 가지 중 하나,
우리들의 썰렁한 대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