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220 2004.10.01 16:42:19


안도현


삶이 참 팍팍하다 여겨질 때, 손님 두어 사람만 와도
신발 벗어두는 곳이 좁아 신발들끼리 엎치락뒤치락 난장판일 때
어린 아들은 떼쓰며 울고 돈은 떨어져 술상 차리기도 곤란해지면
아내는 좀더 넓은 평수로 이사 갔으면 좋겠다고
쌀을 안치다가도 파를 다듬다가도 좀더 넓은 평수, 평수 하는데
팍팍하다 못해 삶이 더는 앞으로 나아갈 것 같지 않을 때
나는 전에 살던 집을 생각하고 그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단칸 셋방에서 딸아이 하나 낳아 기저귀 갈아주던 때
먼 데서 친구가 오면 아이 들쳐 업고 아내는 친정 가서 자고
내 친구하고 밤 늦도록 술 마시고 깬 다음날 아침에는
부엌에서 술국 끓이는 냄새가 꿈결인 듯 스며들던 집
식구가 단촐한지라 변소 푸고 나서도 오물세를 조금만 내고
주인집 인터폰 옆에 딩동딩동 소리 나는 벨 하나 대문에 달고
내가 늦게 귀가할 때마다 미안해하며 누르던 집
송학동 굴다리 지나 붕어빵 굽던 구멍가게 지나 목욕탕 지나
월부로 냉장고 한대 살 수 없을까 자주 힐끔 들여다보던
금성대리점 지나면 일년에 삼십만원 사글세 집
십만원짜리 마라톤 4벌식 타자기 한대 있으면 참 좋겠는데
다음 달 보충수업비 받아서 사버릴까 생각하던
주인집으로 전화가 걸려오면 마루를 살짝살짝 밟고 가서
통화를 끝내고는 우리도 전화 한대 있으면 참 좋겠는데
다음 다음 달 보너스 받으면 사버릴까 도란도란거리던
형광등 불빛이 비추던 밤이 깊던 그 집에서
나는 신규발령장 인주가 마르지 않은 중학교 국어 선생
자전거 타고 퇴근해 그 집에서 고추전 부쳐먹고 싶어진다

나는 또 대학 다닐 때 자취하던 집을 잊을 수가 없다
거기에 내 청춘의 입맞춤 자국이 묻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우체국 소액환으로 열심히 하거라, 보내준 생활비를
술값으로 다 날리고 반찬거리 떨어져 슈퍼아줌마한테 자주
외상 달아놓던 라면 끓이다가 심심찮게 폭삭 엎어버리고 말던
지금 생각해 보면 늘 배고프고 하루종일 쓸쓸한 집
일 년에 한 번 꼴로 이불보따리에 책 몇 권, 전기밥솥 싣고
옮겨 다니던 지금은 주소도 알 수 없는 그 자취집, 그 하숙집들
그 시원찮은 빨래들이며 하이타이 냄새 나는 세월들
일찍도 아기 지운 친구의 애인들에게 미역국 끓여주던 기억
십이월마다 찾아오던 통지 없는 신춘문예 낙선의 기억
계엄군한테 직싸게 얻어 맞고 빨간약 발라대던 기억
아픔도 없이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아프던 기억
나는 저혼자 돌아가는 레코오드판처럼 거기서 잘도 살았다

지금 호적에 등재된 내 본적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대당리
주소만 봐도 나는 가슴이 아프다 우리 아버지
평생 사실 줄 알고 경상도에서 이주해 가서 지은 집
울타리가 없어 집 안 가득 바람이 많던, 팀스피리트 훈련 때는
근동에 전투기가 총알을 쏟아붓고 갔다는 소문이 들리던 집
추운 날 마당에서 세수하고 문고리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고
변소간에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정말 쪼개질 것 같던
겨울방학 때 가면 일년 동안 동생들이 키운 염소를 잡아
창고에 매달아 놓고 구워 먹고 볶아 먹고 고아도 먹던 집
어머니는 그 노랑내 나는 국물이 보약 된다고 훌훌 마시라고
나는 안 마신다고 내빼서는 밤새 들판에 내린 삐라를 줍던
개학 하고 학교에 내면 표창장도 주고 공책도 준다는
교과서 두께의 책삐라를 주워 똥도 닦고 코도 풀면
아버지는 종이가 그렇게 없느냐고, 말없이 군불을 지피시던 집
나는 그곳을 한번도 내 고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면소재지 차부에서 버스를 내리면 뭉클한 게 있고
방학 끝나 차 타러 마을 빠져나오면 또 가슴이 미어지던 집
아버지 배추 농사로 번 돈으로 시집을 사 읽으면서
그 어둠침침한 공부방 메주 뜨는 냄새가 되고 싶어진다

경기도로 피난가듯 가기 전에 내 밑에 동생과 나는
가겟집 아이였다, 한겨울에 칠성사이다 달라고 조르다가 매맞고
내복 바람으로 쫓겨나서는 언 유리창에 대고 싹싹 빌던
한참 까불 때는 숟가락 잡고 둘이서 콩쿨대회도 열었지마는
토닥토닥 다투다 손톱자국이라도 생기면 어머니는 화가 나
옆집 누구네처럼 엄마 없는 자식 되고 싶냐고, 우리는
별수 없이 또 싹싹 빌고는 라면땅 한봉지씩 나눠 먹던 집
연탄불 꺼진 날 솜이불 덮어쓰고 개구리같이 쪼그리고 있으면
동생과 내 입김으로 서로 훈훈해져서 금세 잠들고 말던 집
셋째와 넷째가 태어나도록 우리 여섯 식구는 이사도 안가고
그 단칸방에서 살았는데 예천농고 농구선수였다는 아버지
주무실 때 두 다리 쭉 뻗는 걸 한번도 못 보았으며
그래서 이불이 천막 같아서 잠잘 때마다 무릎이 서늘하던 집
그 무렵 찍은 흑백사진은 빛 바래거나 파리똥 앉았지만
나는 좋았다 나 시험지 백점 받아 오면 짜장면집에도 갔었다

그 이전에는 어디서 살았나, 이것은 내가 잘 모르는 일
나중에 자라서 알았지만 봉창 달린 예천 큰댁 작은방에서
나는 태어났다는데 솜털이 원숭이 새끼같이 보송보송한 것이
어른 손바닥 크기만한 것이 방 하나를 다 차지했었다는데
퉤퉤 쓴 침 뱉듯 육군 병장 제대하고 돌아온 집
조카들이 바글바글 울 때 마음 놓고 술 한잔 하고 싶을 때
그때부터 젊은 우리 아버지도 지금의 나처럼
물을 긷다가도 배추를 씻다가도 좀더 넓은 집, 넓은 집 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처럼
삶이 참 팍팍하다, 앞으로 나아갈 것 같지 않다 여겨질 때
옛날 살던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흙벽에 시래기 몇 두름 마르는 서러운 겨울 한낮
호박죽 끓던 가마솥 앞에서 군침 꿀꺽 삼키며
그 뜨끈하고 걸쭉한 호박죽을 기다리던
수숫대같이 키 큰 한 소년을 오래 오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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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오늘부터가 시작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