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ty6646 2008.05.22 07:20:25
20년 전 고교시절때, 1년에 서너번 시골 큰집에 가게 되는데,
시골 큰집에 가면 누나 넷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에게 사촌누나는 친누나와 다름아니다.

어느 해의 명절전날밤, 한밤중의 제사를 앞두고
나와 동생은 누나들과 함께 골방에 앉아서 카드놀이를 했다.
이불을 가운데 두고 빙둘러 앉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전투적인 게임을 했다

그때 참 많이 웃었다. 그냥 웃은 것이 아니라 모두들 목청껏 소리높여 신나게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배가 아플정도로 웃었고, 뒤로 나뒬궁 정도로 웃었다.
참 신나고 재미있었고 즐거운 저녁시간이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던, 웃음만으로 꽉 채워진 시간을 보냈었다.

그 몇년후 누나들은 차례차례로 결혼을 하며 큰집을 떠나갔다.
누구는 과수원집에 가고, 누구는 경찰아내가 되었다.
또 누구는 회사원 아내가 되었고, 막내 누나는 상인의 아내가 되었다.

그 후로 명절때 큰집에 가도 누나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누나들은 시댁에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기에 모두가 다시 만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아니, 단 한번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화도 뜸해졌고,
어느 땐가부턴 가물가물 들려오는 소식외에는
살아가는 모습을 알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처럼 명절 전날 큰집에 갔더니, 갔더니, 갔더니
누나 넷이 전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반가웠다. 너무나 오랜 세월 연락도 없이 살아온 탓에
처음엔 잠깐이었지만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린 금새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 다시 한밤중의 제사를 앞두고 빙둘러앉아 신나게 놀았다.
누나들의 미소도 예전 그대로이고, 누나들의 맑고 큰 웃음소리도 변하지 않았다
내심 안심했다. 속으로 눈물한방울 찔끔한 거 들켰을까 싶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이불속에서 잡은 누나들의 손을 놓치 않았다.
정말 반가워 누나들^^









등돌리며 살아가는 친구 하나가 있다.

넉넉하게 살아가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짠돌이었다
반면에 가난하게 살아가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에게는 노가다 해서 번 돈을 전부 써버리는 나였다.

당연히 그 친구를 만나면 늘 계산은 내가 하게 되었다.
그 친구를 알게된지 10여년이 흐르면서 난 내가 계산한지도 몰랐는데
너무나, 너무나 그 시간과 횟수가 길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깨닫게 되어버렸다

어느날 돈이 한푼도 없었는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래 친군데 내가 돈이 없으면 커피값 정도는 내 주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나갔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별거아닌 야그를 씨부리고 일어설 시간이 되었지만
언제나 처럼 팔딱 일어나 카운타로 가지 않고 그 친구처럼 그냥 죽치고 앉아있자
야 그만 가야지.... 하고 친구가 말한다.
그래 가야지... 하고 내가 대답한다

친구와 일어서서 나가는데 어느새 친구는 날 두고 커피숖을 나가버린 것이었다.
카운트의 종업원에게 머리를 숙이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친구를 찾아서 커피숖을 나갔다
그리고 사정이야기를 하자 친구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처음부터 돈이 없다고 말했어야지, 넌 돈도 없이 친구 만나냐?


친구의 그 말이 그땐 정말 충격이었다.
커피한잔 얻어먹겠다고 그에게 내민 내 손을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성질 팍팍 내면서 지갑속의 수표사이에서 만원짜리를 꺼내어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 가버리는 친구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렀다.







전화가 왔길래 무심히 받았더니 친구였다
어? 아? 너? 오오오오오오오.... 야 오랜만이다. 잘 있었냐?

실로 오랜만이라 찾아내야할 말을 찾지못한채 잠시 횡설수설하고 있자니
저 쪽에서 만나자라고 한다. 당연히 10여년전의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떠올랐다
커피값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한때는 출근도장 찍듯이 만났던 친구인지라
그와 떨어져 지낸 10여년의 형상을 보고도 싶었다.

시내의 모 커피숖에서 기다리자니 친구나 나타났다.
40대를 앞둔 평범한 남자의 모습이다. 다만 머리카락 숫자가 조금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나를 발견하고서 다가오는 그의 해맑고도 순수해보이는 반가워 죽겠다라는 표정속에서
그에 대한 경계심을 어느 정도는 풀 수가 있었고, 물론 당연히 나도 반가워 죽을 판이었다.

반악수, 반 포옹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니 그가 바로 내 팔을 끌고 나가자라고 한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고급레스토랑 특실....
그날 난 그와 단둘이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특실에 마련되어 있던 노래방기기로 노래도 불렀다.
무슨 이유로 10여년만에 갑자기 나를 찾아왔는지 물어보지도 못한채 난 그와 껴안고 뒹굴다시피하며
10여년간 방류하지 못한 우정을 일시에 방류하듯 그렇게 심하게 신나게 놀았다.
반가웠고, 찜찜하며 아팠던 마음한쪽이 말끔히 나아버렸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서 깨어나니 오후 4시경,
드리워진 카텐너머로 얇은 햇살이 살짝 비집고 들어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내 땀방울 속에서 보석처럼 부서진다

10여년동안 만나지 못한 누나들을 만나서 신나고 즐겁게 놀았는데.....
10여년동안 등돌리고 살던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
마음속의 엉어리를 풀고 신나고 즐겁게 놀았는데.......

음울한 어둠속에서 일어나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굳은채로 있었다
방금전의 만남을, 아니 한조각의 꿈이라도 흐트러지게 하고싶지가 않았다
그대로 내 기억속에, 내 가슴안에 응고시켜두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누나들과 친구가 머물다간 듯한 꿈길로 달려가 앉아
석양의 그림자를 등에받고 한없이 젖어가는, 젖어가는, ....
젖어가는 마음을 다잡아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