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s010534 2009.09.14 08:36:06
영화 <달콤한 인생>은 누아르라는 장르를 표방한다.
그리고 이미지에 걸맞게 영화 속에서는 허무감이 잔뜩 베어 있다.
영화 초반 선우(이병헌)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선우의 셰도복싱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초반부 독백은 불교의 선문답이다.
그것이 벽암록의 고승 이야기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 선문답은 마지막 부분의 고승의 달콤한 꿈 이야기와 겹치면서 허무감을 극도로 나타낸다.
깔끔한 외모와 그 외모만큼 깔끔한 일처리를 자랑하는 김 실장은 강 사장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을 받는다.
자신의 젊은 애인에게 남자가 있는지 감시하고, 만약 그렇다면 조용히 처리해 줄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선우는 강 사장의 젊은 애인을 보는 순간 마음에 파장이 인다.
아주 조그만 파장.

'스승님 버드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나무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까?
바람이 움직이고 있는 겁니까?
제자야. 그것은 바로 네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우의 흔들리는 마음은 결국 그녀와 애인 모두를 살려두게 되고,
이것을 강 사장은 자신에게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 그를 죽이려 한다.
물론 죽이기 전 선우가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면 살려두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선우는 자신의 그 작은 파장을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파장은 이내 커다란 파도로 밀어닥쳐와 끝내 강 사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한밤중 제자가 잠에서 깨어나 흐느낀다.
이것을 괴이하게 여긴 스승이 왜 우느냐고 묻는다.
제자는 달콤한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는 것이냐?
그 달콤한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할 달콤한 꿈.
그 꿈을 꾸는 동안의 달콤함은 잠시 일어난 마음의 파장과 같은 것.
버드나무도 아니요 바람도 아닌 너의 마음이 흔들릴 때 그 흔들림을 끊는 방법은 바로 자기 자신의 소멸을 통해서다.
불교의 수행은 바람과 버드나무와 나와의 관계에서 발생되는 움직임의 소멸이 아니며,
움직임 그 자체의 소멸도 아니며, 바로 자기 자신의 소멸을 통해서 모든 움직임 자체가 사라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우에게 그 자신의 소멸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는 물 위를 바라보며 자신의 모습에 취한 나르시시스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르시시트임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지막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섀도복싱을 하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며, 그 허공을 가르는 주먹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창 밖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욕망의 도시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모호한 모습,
그 자체를 통해 나르시시즘과 허무주의를 모두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어요. 말해봐요'

아마 선우는 평생을 생각하더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7년을 섬겨온 보스가 왜 자신을 내치는지 그 자신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 선우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선우는 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호수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빠져 숨진 나르시스처럼 선우 또한 우상화된 자신의 모습에 빠져
끝내 끝을 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허무주의로 향해 가는 그 길의 끝을 그는 결말을 알면서도 끝내 되돌아서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이, 자신이 생각하던 그 아름다운 선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까....

크리스토퍼 래시가 70년대 미국사회를 나르시시스트의 사회라고 보았듯이 그 사회는 현재 우리 서울의 모습과 닮아 있다.
스포츠에 열광하기도 하고, 스타에 광분하며, 자신의 블로그에 영혼을 뺏기는 모습 속에서,
나도 우리도 모두 일정 부분 나르시시스트임을 인정한다면 선우의 자기애와 그 끝없는 허무에의 질주를 이해할 법도 하다.


[출처] 나르시시스트 선우..|작성자 농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