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사

pearljam75 2005.07.12 23:41:04
내핸폰.JPG

몇 년 전부터 여기저기 아프기도 하고 몸이 말을 안 들어 내 속을 무던히 썩히기도 했지만
올해는 넘길 줄 알았다.
설마 화창한 7월의 어느 아침에 그렇게 떠날 줄은 몰랐다. 향년 5세.

삼성 애니콜 플립 모델명 SPH-A2106 ...2001년 4월 13일 생. 현재는 단종된.
엄마가 길거리 행사대에서 십 만원 주고 사주신. 내 생애 최초의 핸드폰.
DM OFFLINE MODE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 2005년 7월 12일 오전 열시, 얘는 이제 전화가 안 된다.

먹통이 되어서 다시 전원을 켜보니 액정에는 안테나 안뜸 표시가 떴고 화면 가운데는
‘DM OFFLINE MODE’라는 글이 생겼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멘트는 무슨 뜻일까?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보니 삼성 애니콜 제품인 경우, 메인이 나가서 그렇단다. main? ...
이미 고무줄 두 개를 동여매 연명하던 아이였는데 이건 뇌사판정이 분명하다.

전원도 들어오고 전화번호 200개도 고스란히 저장이 되어 있어 확인할 수 있지만
이제 전화를 받을 수도 걸 수도 없다. 통화 버튼을 누르면 서비스 지역이 아니라고 여자는 말한다.
얘는 그녀라고 불러야겠다. 왜 모든 안내멘트는 여자 목소리로 이루어져있을까? 왜? 왜?
남자가 녹음하면 안 되나? 멀더 요원 목소리를 맡은 성우가 안내해주는 거 듣고 있으면
음흉하고 섹시하니 좋을텐데...

이 아이의 지난 5년간의 행보는 다음과 같다.

변기 투하 1회, 그로 인한 기절 1회, 이어서 A/S 서비스 방문 1회, 음주 후 분실 1회, 그에 따른 회수 1회,
건망증으로 인한 분실1회, 그에 따른 회수 1회,
타인의 두개골 난타 1회, 커플요금 믿고 까불다 배터리 터질뻔한 사건, 그 밖에 ...
뭐 그리 파란만장 하지 않았다.
하여간 이제 좀 쉬어야 할 때!

뭐든 끝을 보고야마는 성격 때문에 바둥바둥 갸날픈 이 아이 고생이 많았다.

핸드폰도 없이 옛날에 나는 어떻게 신촌이나 종로같이 사람 많은 곳에서 약속을 하고
사람을 만났는지 모를 정도로 통신의 혁명은 가속화, 대중화되는데
사실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점점 치사해지고 엷어진다.

이제는 발신번호 추적땜에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슴 떨려하면서 몰래 전화를 걸었다가 받으면 끊고,
받으면 끊고 하는 지랄을 떨 수도 없으며, 외박하고 술 마실 땐 엄마, 아빠의 잦은 전화에 눈치를 봐야하고
위치추적으로 내 소재가 들어나 잠수도 제대로 못타는 시대다.

한 6개월, 핸드폰 서비스를 정지시켜놓고 산 적이 있었다.
무척 재밌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는데 다시 한번 그렇게 살고 싶지만 일 때문에 그럴 수는 없어서
후딱 인터넷 쇼핑몰에서 슬라이드형 컬러 핸드폰을 주문했다.

단음에, 흑백화면에, 전화번호도 200명밖에 저장이 안되는 또 몇 년간 컬러링은 'Take on me' 여서
오랜만에 전화 거는 놈들 족족 제발 음악 좀 바꾸라고 퉁을 놓았었는데,

이제 카메라도 달리고 컬러화면에 몇 화음이 벨소리로 울려대는 매끈한 핸드폰...
이번에도 믿는 삼성 애니콜 제품이니 또 한 5년 동고동락할테다.

얘는 보상교환하지 않을 생각이다. 반납하지 않을 경우 2만원의 비용이 더 지불된다는데
나중에 시대극(?) 찍을 때 소품으로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고,
전원만 켜지면 보상해준다고는 했지만 고무줄 2개만 떼어내면 그게 산소호흡기라도 되는 냥
배터리와 상단부분이 분리되어버려 전원이 홀라당 나가버리는 관계로 반납하는 게 양심에 반한다.

게다가 너무 정들어서 내가 간직하고 싶기도 하고...

뇌사상태에 빠져버린 플립형 핸드폰,
눈 먼 늙은 개,
구멍 난 4년차 나이키 스니커즈,
13년 된 분홍 머리핀,
30년 된 발렌타인... (이건 아닌가? -.-a)

나는 이런 것들에 마음이 가니 나중엔 땅 좀 사서 고물상 차려 먹고 살아야겠다...
오랜된 것들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아, 이런 때 또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은 R.E.M 의 ‘Imitation of Life' 로구나. 에헤라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