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 영화역사
26 개

신 독일 영화....

venezia70
2004년 01월 09일 16시 46분 03초 409017
1. 신 독일 영화

나치 정부는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후 영화 산업을 장악했는데, 나치가 패배하자 그와 함께 독일의 영화 산업도 붕괴하였다. 서방 점령국들은 (특히 미국)은 엄격한 겸열로 독일 영화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이러한 상황을 커다란 독일 시장을 장악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로인해 독일 영화는 자립성을 상실하고 영화 시장에는 저급한 할리우드 오락 영화가 넘치게 되었다.

1949년 공식저으로 동곡과 서족이 나뉘고 나자 서독 정부는 신용 융자를 제공함으로서 영화 제작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고자 하였지만, 1950년에서 1956년 사이에 독일 (서독)에서는 만들어진 많은 영화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좀처럼 영화 시장은 활성화 되지 않았다. 57년이후 텔레비젼과 경쟁이 증대되자 이 작은 성장 기잔 마저도 끝이 났고,
1961년 영화 산업은 최저점에 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 영화의 홍수 속에서 자란 일군의 젊은 감독들은 1962년 오버하우젠 영화제에서 "이제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며 기성감독들이 사용한 제작비의 절반으로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것을 주장하는 "오버하우젠 선언"을 한다. 즉 이제는 1950년대의 전통적인 로망이나 드라마풍을 거부하고 의식적이고 기록영화적인 새로운 스탈일을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오버하우젠 선언 후, 정부가 대안적 영화 작업을 지원하도고 설득하기 까지는 얼마 간의 시간이 필요 했다. 그러나 1964년 젊고 경험 없는 감독에게 무상 융자를 제공하기 위해 "청년 독일 영화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이러한 조치는 신독일 영화를 위한 돌파구가 되었다.

드이더 알렉산터 클루게의 첫 장편<옛 소녀>. 폴커 슐레도르프의 <젊은 퇴를레스>등의 많은 중요한 영화들이 개봉된 1966년은 신 독일 영화의 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많은 영화들이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하였고 다른 나라들도 갑자기 독이에서 무엇인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2. 신 독일 영화의 경향

신 독일 영화는 긴밀하게 통일된 운동은 아니었지만, 광범한 형식적, 양식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그들은 독일어 사용권 국가들의 가까운 과거와 당대 상황들을 탐구하게 되면서 대부분 사회적,정치적으로 동기 부여 됬었고 장 뤽 고다르를 위시한 프랑스 누벨바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 역시 단편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고 전 세대의 영화를 거부한 데서 그러하다. 하지만,신 독일 영화 감독들은 영화 형식에 대해 서로 유사한 접근 방식을 취하게끔 이끈 중심적인 이론적 또는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대신 주로 유리한 제작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공통의 필요에 의해 결속되어 있었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_1974>알렉산더 클루게의<강자 페르디낭_1976>,그리고 집단 연출 작품이인 <가을의 독일_1978>등은 각각 인종주의,파시즘,그리고 정치적 검열을 포함한 독일 전반의 상황이라는 관점에서 그 당시 독일을 치열하게 들여다 본다.

그리고 일련의 감독들은 극소수의 관객들을 위해 극히 실험적인 작품을 창작했다. 이를테면 베르너 쉬뢰더의 <마리아
말리브란의 죽음>은 유명한 가수의 삶에 대해 오페라푸으이 명상을 부여했는데, 양식화된 세트,의상,그리고 주위 환경은 표현주의적 전통을 상기시는 반면 캠프 주변의 분위기는 미국의 독립 영화 작가들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감각파"라고 일컬어지느 경향도 있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참여로부터 우우라고 시적이며 심지어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여상들은 축한다. 베르너 헝조그는 이들 중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의 영화들은 독일 낭만주의와 신비스러고도 압도적인 자연관으로 복귀한 영화들은 독일 낭만중의와 신비스럽고도 압도적인 자연과으로 복귀한다.<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에어조그는 권력을 열망하느라 미쳐버린 여웅적인 탐구자를 제시하고 <가크허 하우저의 수수께기>는 헛간에 묶인 채 생활하는 순진한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이 두편의 영화는 관객에게 자연에 대한 황홀경의 탐구를 제시한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많은 신 독일 영화 감독으들은 외국에서 작업하거나 더욱 국제적이고 대중적인 관객을 목표로 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헤어조그는 <노스페라투_1978>를 미국 20세기 폭스사의 재정 지원 받아 제작했으며, 미국,남미,유럽 등지에서 활동의 폭을 넓혔다. 쉘렌도르프의 <양철북_1979>은 미국에서 상영된 가장 성공을 거둔 외국 영화 가운데 하나이다. 1982년 이들 중 가장 활동적이었던 파스빈더의 죽음과 그 외 감독이 여러 나라로 분산해 버리면서 신 독일 영화는 사실상 끝난 것으로 여겨질 수있다.

3.대표적 감독과 작품들

1)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파스빈더는 쉘렌도르프의 1969년 영화<바알>에서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겸 감독이다. 유학파와는 달리 독일안에서
만 영화를 공부하고 만들었던 그는 <마리아 브란운 결혼>이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처럼 멜로 드라마 형식을 빌어 일반인들이 영화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해 독일 영화인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파스빈더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으로,뒷 골목 깡패들
동성애자, 외국인 노동자, 창녀, 노인들이다. 그 주인공들을 나치 시대와 미국 점령기 그리고 1970년대의 독일 사회에서 그려왔다.

그러나 <사계절의 상인_1971>이후로 그는 고전적 멜로 드라마의 형시과 양식을 수정하는데,<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폭스와 그의 친구들>은 현란한 화면구성,색채 전략,그리고 비틀릭 비꼬인 플롯과 함께 나오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파스빈더는 양식화와 사실주의 혼합이 가져오는 것은 어떻게 때때로 권력의 미시정치학에 의해 인간관계들이 결정되는가에 대해 관개긍로 하여금 반추하도록 강요한다고 믿었다.

1982년 서른 여덟의 나이로 요절한 파스빈더는 신 독일 영화 전체를 대표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신 독일 영화는 끝이 났다고 칭송되어진다.

2) 폴커 쉘렌도르프
독일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사람 중 하나로 1966년에 그의 최초의 장편 영화<젊은 퇴를레스>를 만들었고, 그 이후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카타리나 불룸의 잃어 버린 명예_1975>는 그의 아내 마카레타 폰 트로타와 공공 각색,연출한 것으로서 도피 중인 한 정치 활동가와 함께 밤을 보내고, 그 결과 당국과 인기있는 언론 기관에 의해 추적을 당함으로써 굴욕감을 맛보아야 하는 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이다. 권터 그라스의 최초으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양철북_1978>은 신독일영화 최고의 국제적 성공작이다.

3) 빔 벤더스
신독일 영화의 마지막 세대로, 로드 무비 3부작인 <도시의 앨리스><그릇된 행동><시간의 흐름속에서>를 통해 서독의 상황을 차갑게 그린 빔벤더스는 분단, 미국 문화 , 도시으 삶 등 심각한 주제를 마치 고행하듯 그려낸다. 그의 대표작
<베를린의 천사의 시>는 독일 통일을 예언하는 듯한 작품으로 그의 영화중 가장 뛰어난 걸장로 평가 받는다. 또 다른 로드 무비 <파리 텍사스>에는 그가 주로 다루는 소재인 현대 사회으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잘 나타나 있다. 이후 그는
계속 로드 무드를 통해 "길 위의 방황"으로 여러 문제를 제시고 있다.

이상 유럽 영화의 역사를 그 동안 열거 했는데.....도움이 되셨는지....저 또한 다시 한번 보게 되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습니다....비록 제가 집필한 역사는 아니지만 유익했습니다....출처를 굳이 말하자면 인터넷이라고 말 밖에 못하겠습니다..그 사이트 주소를 잊어 버려서....00년도에 프린트 해놓거라.....출처를 공개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다음에는 다른 지역의 역사를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언저리 venezia70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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