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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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징그러운 나이

vincent
2004년 01월 06일 05시 03분 05초 1178 16 3
"안돼 안돼.. 서른넷이 됐는데도 사람 때문에 상처 받으면 안돼."
"서른셋엔 됐는데 서른넷엔 안돼?"
"어 안돼. 무조건 안돼."

감기 때문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도 친구와 하이톤의 수다를 떨 수 있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가자
우기면서 근거 없이 '무조건'을 자주 덧붙이고
우리끼리는 막 접고 봐주고 넒은 마음으로 포용하면서
그것을 돈독한 우정의 증거로 여기는 대화를 자주 나누게 되었다.

서른넷.
아직도 이 나이가 입에 붙진 않지만,
영 남의 나이 같지만
정 붙이고 살다 보면 그럭저럭 괜찮을 것이다.
작년 이 맘 때, 서른셋씩이나 먹어서 얼마나 화들짝 놀랐었던가.
그런데 그 일년이 이렇게 후딱 가버렸으니
곧 이 일년도 후딱 가버릴테고
어느새 서른넷이 내 나이다, 생각이 들 때 쯤
또다시 화들짝 놀랄 서른다섯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겠지.

조지 오웰이 이랬다.
"마흔이 되면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얼굴을 가지게 된다"
뭐냐, 그럼.
그 전까지의 얼굴은 자신과 별로 안어울리는 얼굴이란 말이더냐.
전지현은 지금 얼굴이 전지현과 어울리는 거 같고
원빈은 지금 얼굴이 원빈하고 어울리는 거 같은데
그들도 마흔씩이나 먹어야 어울리는 얼굴을 갖게 된다니...
한 편으론, 쌤통이고 한 편으론 슬프다.
물론, 정확하게 들어맞는 예도 있다.
조지 오웰이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다.
최민식 아저씨는 지금 얼굴이 '꾸숑' 때 얼굴보다 훨씬 어울린다. --
나는 아직도 6년이나 더 살아야
나랑 어울리는 얼굴을 갖게 될테지.
여기 계시는 어떤 분들은 곧 어울리는 얼굴을 갖게 되실테니 축하드리고 싶다.

잔치가 끝났다는 서른살을 훌쩍 넘기고도
아직 잔치 같은 거 가본 적도 없는데 끝나긴 뭐가 끝나냐고
생떼를 쓰며 몇 년을 버텨왔는데

이제는
잔치 같은 거 끝나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고
아직도
"너 커서 뭐 될래"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는데 어쩌냐고.

그래서 결론은.
꿋꿋하게 한 살 한 살 나이 먹어가겠다고.
마흔살이 됐을 때,
그 때 어울리는 얼굴이 히스테릭한 사감선생 같이 보이지 말게 해달라고
가끔 기도라도 드리면서
기쁘게 기다려야지. 마흔살이 되는 것을.


아, 그래도 역시 징그러운 나이. 서른넷.
1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uni592
2004.01.06 12:43
3! 4! 나나 나나나 나나나나~
silbob
2004.01.06 14:57
빈님, 우리 같이 늙어가요.
vincent
글쓴이
2004.01.06 16:35
굳이 같이 늙어가겠다고 한다면 억지로 뜯어말릴 생각은 없지만...
실밥님, 그대는 아직 좋은 나이라오. --
(저리 활기찬 오구리님과 동갑이지 않소)
panicted
2004.01.06 18:42
빈센트 님은 여자분이시죠?
Profile
pearljam75
2004.01.06 19:38
임순례 감독님은 서른넷에 <세상밖으로> 스크립터로 영화판에 입문하셨드랬죠.
우리 훌륭한 박완서 선생님은 마흔에 문학계에 등단하셨구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우리 KTF적인 생각 가지고 살아요, 흑흑.....!!
vincent
글쓴이
2004.01.06 20:08
리플이 메일로 오는 기능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네요.
가끔 사라진 리플들도 볼 수 있어서 재미있긴 하지만.

패닉티드님. 네네. 저 여자래요.
나이 때문에 '혹시 남자였나?' 하셨나보군요. --;;;

펄잼75님, 위로해주신 건 감사하나...
우리.. 먹어가는 나이를 그 사람은 이 나이에도 이랬어..하면서 위로하려 들지 말기로 해요. --;;;
저는 아마 평생 "너 커서 뭐 될래" "너 그러다 뭐 될래"라는 핀잔같은 질문을 듣고 살지도 모르겠고
또 그러기를 은근히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일 말고도 재미삼아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도 꽤 많이 남아 있거든요.

그리고 전 절대...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
panicted
2004.01.06 22:24
아니.. 그런건 아니었어요 ^^
hose0403
2004.01.06 23:34
근디 누군가 이런말을 하시더군요.. 서른때 어영부영하면 곧 마흔된다고.....
이 말에 충격받으시는 분들이 꽤 있더라구요.... ~~~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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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eva
2004.01.07 04:39
나이라...저도 별생각없이..하루 하루 나이 먹는게 왜 이젠 그렇게 피부로 와닿는지...이번새해는 그냥 집에서 혼자 보냈습니다. 왕따당하거나 그런건 아니구 그냥 내가 지내온 날처럼 2004년을 인식하고 싶지 않았다고해야하나요...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걸...인정하고싶지 않아서..그런데...먹더군요...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라는건...연애할때..누군가에게 푹빠졌을때나 사용되는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문득..^^;;
73lang
2004.01.07 10:13
주변 분들이 지헌티 하시넌 말씀이

'널 보면 진짜루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나이는 벌써 서른 두 살이나 처먹은 놈이

얼굴은 20대고

하는 짓이나 정신연령은 10대인거 보니깐...'

거 참...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넌고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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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unduri
2004.01.09 00:26
빈센트님 할 말이 없습니다. 슬프고 공감합니다.... 쩝...
uni592
2004.01.09 12:53
동정유발작전은 성공하여 변두리에서 떠돌던 자 수면위로 올라오니 이 아니 기쁠소가..
vincent
글쓴이
2004.01.09 14:21
영문아이디로 변신하셨군요 변두리님. (오구리, 내가 언제 동정유발작전을 폈어요? 응? 응?)
그래서... 당선 턱은 언제 내신다구요? (이게 벌써 몇 년 전 얘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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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unduri
2004.01.10 04:42
음... 당선턱이라? 무슨 당선턱이요? 도대체 언제적 이야기신지... 쩝. 그 당선턱 때문에 본인은 적자났다는.... 쩝...
조촐하게 포장마차에서나 한잔 사들이지요... ^^;;
vincent
글쓴이
2004.01.10 19:16
아, 예. 날(저 말고..--) 잡읍시다.
silbob
2004.01.11 04:29
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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