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영화일을 하다 보면 종종 몇 몇 시나리오가 손에 잡혀 읽게 된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면 항상 재밌다, 재멉다라는 평가가 뒤따르게 마련인데, "날 보러 와요"라는 시나리오는 정말이지 여지껏 읽어본 시나리오 중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날 보러 와요"는 소위 말하는 실화극으로, 미결로 끝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쓴 시나리오였다.
김광림 연출의 "날 보러 와요"라는 연극이 원작이었지만, 시나리오로 재탄생한 "날 보러 와요"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쥑인다'라는 반응이 나돌았다. 나 역시 그에 일조했다.
이건 마치...
한국적으로 풀어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감탄?
후에 "살인의 추억"으로 제목을 바꾼 이 시나리오는 너무나 많은 미덕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소재 자체가 매력적이다.
10여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실제 사건을 두고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매우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케이스 자체가 드문 우리나라에서 지능적 범행으로 경찰을 미궁속으로 몰았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영화적이다.
한국적 캐릭터가 살아 숨쉬고 있다.
"살인의 추억"에는 세계 어느 나라의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적 캐릭터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그래서 너무 신나고? 재밌다.
박두만, 조용구 형사를 필두로 화성과 관계된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미치도록 생생하고, 한국적이다.
이건 인물들의 행동이나 대사, 상황묘사를 예로 들어가며 설명해야 하는 것들인데, 영화감상문에 내용은 최대한 배제하는 본인의 원칙상 그렇게는 못하겠고...
어떻게 이런 것들을 포착해 냈을까 하는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80년대 중후반의 한국사회의 사회상(시대분위기)을 아우르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대변할만한 분위기가 있다.
이 영화는 다만 연쇄사건을 쫓아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속엔 왠지 어설프고, 막무가내이고, 폭력적이고, 인간적이고, 불합리와 합리, 폭압과 자유가 서로 충돌하던 80년대 중후반의 사회상이 매우 유연하게 포착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상은 그야말로 유연하게 영화를 보는 이의 정서에 스며들게 된다. 정말 묘한 매력을 지닌 영화이다.
구조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
좋은 시나리오는 경제적이다.
최소비용으로 최대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효율적인 경제활동이라면, 최소내용들로 최대재미를 창출해내는 것이 효율적인 시나리오인가?(무식함이 탄로나는 순간이지만, 효율적인 시나리오가 무엇인가에 대한 한 줄 정의는 솔직히 까먹었다. ^^;)
지문 한 줄, 대사 한 줄이 무의미한 듯 하지만 다음 장면을 위한 동기로 작용하고(모티브니 뭐니 그런다.), 한 가지 이상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경제적인 시나리오인 것이다.
모든 씬들이 유기적 연관성을 가지고 결말을 향해 치닫을 때 시나리오는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그러한 시나리오이다.
실화극이라는 한계로 인한 결말의 뜨뜨미지근함이 최대의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단점 마저도 상당히 쿨한 마무리로 인해 상당부분 커버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매우 코믹하다.
이러한 코믹은 그저 웃기기 위한 코믹이라기 보다는 상황 자체가 웃을 수 밖에 없는, 허탈하고 황당해서 웃을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웃음이기에 풍자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대개가 시골 형사들이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데 웃음들인데, 송강호라는 훌륭한 배우의 캐릭터와 맞물려 매우 코믹하면서도 씁쓸한, 아주 매력적인 웃음을 발산하고 있다.
이 밖에 본인의 무식함으로 인해 이로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장점을 안고 있는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라는 신뢰할 만한 감독에 의해 그 장점들이 그대로 살아있는 영화로 재탄생되었다.
물론 본인이 생각하기에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부처님 앞에서 염불 외는 꼴이 될 것 같아 감히 언급하기가 민망스럽다.
실화극으로는 최고의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살인의 추억"으로 다시한번 들춰진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사지가 썩어 죽을, 망할 놈의 범인이 잡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서 정당한 죄값을 치렀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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