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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정전

truffaut
2005년 01월 20일 02시 02분 23초 5491 3 75
군대 가기전 스무살 마지막 겨울이었다.
영화 한답시고 들어간 학교. 한 학기만에 학교에선 배울게 없다고 저 혼자 결론을 내리고 청춘을 즐기자며 빈둥빈둥 놀다가 두 학기 내리 학고를 맞았다.
그걸 안 아버지는 이 놈의 자식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며 군대나 다녀오라고 했다. 내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뜻으로 학교를 휴학하고 목적없이 허무하게 흘러보내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딱히 무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지금에서야 이 바보야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휴가 나왔을 때 비상금이라도 쓰지 그랬어라는 후회와 자책을 하지만 정말 그 때는 아무런 목표가 없었다. 진짜로 빨리 군대나 갔으면 했다.
군대가면 뭔가 다른게 있겠지하는 막연한 기대심리였다. 그 당시 나는 의정부 외곽의 장흥면이라는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비디오를 빌리려면 편도로만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가게까지 걸어가야 했다.
나름대로 나도 영화광이라고 자부했지만 겨울에 20분이나 걸어서 비디오를 빌리러 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시골 마을에 비디오 가게가 하나다 보니 그 당시 비디오 대여 가격이 대게가 다 천원이었을 때 그 마을 비디오 가게만 이천원 다 받았다. 나는 그런 폭리는 인정 할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당시는 시내에 나가면 폐업 처분한 비디오 가게 비디오를 거리에서 떨이에 파는 행상이 눈에 자주 띄었다. 영화학도인 나는 그냥 지나칠수 없었다.
게다가 기대 이상이었다. 쉽게 구할수 없는 테잎도 싸구려 테잎들 사이에 속속 껴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때 산 테잎들이 <에이리언 1편>, <무방비 도시>, <아비정전>, <열혈남아> 등이었다.
특히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는 뜻밖의 수확이다. 테잎들을 사놓고도 며칠을 방치했다.
백수였지만 나름대로 틈틈히 일도 하고 노느라고 영화감상을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날이었다.
야밤에 잠은 안오고 할 짓도 없고해서 며칠전에 사온 테잎들을 꺼냈다. 무엇을 볼까 하다가 근래에 <중경삼림>을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그래 이 시대의 스타일리스트 왕가위의 초기작을 한 번 볼까하고 생각했다.
<중경삼림>을 너무 재밌게 봤으니까. 그 전작들도 봐줘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봤다.
나른한 음악이 흐르며 카메라가 필리핀의 정글을 훑으며 제목이 뜬다. 장국영의 등장. 조용한 체육관에 장국영의 또각또각하는 발자국 소리만 고요함을 깨듯이 울려퍼진다. 자기집인양 매점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뚜껑을 따고 마신다. 계산을 하다가 점원인 장만옥에게 작업을 거는 장국영. 난 아직도 <아비정전>의 이 첫씬을 잊지 못한다.
9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속에 어른거린다. “잊지마. 우리가 같이 보낸 이 1분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거야.”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작업을 걸며 했던 이 대사하며 영화 중반부의 장국영의 맘보춤까지.
영화 <아비정전>은 이 시대 청춘들의 아이콘이었다. 후에 시간이 흐른후 TV를 보면 시트콤이나 드라마나 <아비정전>의 설정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아이돌 연예인들이 나와서 재연하는 사랑이야기였는데 장국영의 1분을 같이 보내는 대사하며 맘보춤까지 그대로 갖다 배껴 댔다. 나는 그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비정전>을 안 본 다른 사람들은 저게 갖다 배낀건지 모르겠지하는 우월감에 뿌듯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잠깐 삼천포로 빠졌다.
아무튼 <아비정전>을 처음 본 그날 밤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나는 좀처럼 한 번 본 영화는 두번 다시 보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이 너무 재밌어서 두번, 세번 보는 영화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아무리 영화가 재밌었어도 두 번 보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다. 단 한 번 예외가 있었다면 <아비정전>이다. 좀처럼 한 번 본 영화를 또 보지는 않는 내가 연달아 같은 영화를 다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동안 사라졌던 영화에 대한 열정, 젊의 패기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가슴속에서 뭔가 뭉클한 것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청춘에 대한 송가를 영화로 만든다면 이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의 홍콩 톱스타들은 죄다 출연했다. 장국영, 장학우, 유가령, 유덕화 그리고 끝날 때 양조위까지.
영화를 찍을 당시면 다들 젊은 아이돌 스타들이었을텐데 연기들은 왜 그렇게 잘하는지.
이 영화를 보고나서야 왜 왕가위를 스타일리스트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당시 내가 처한 상황하고도 잘 들어맞아서인지는 몰라도 장국영이 너무 멋있었고 왕가위는 벌써 뭔가를 이룬 감독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방황하는 청춘의 허무함을 어찌 이리 잘 포착할 수 있을까.
당시 영화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나에게 나침반을 던져준 영화. <아비정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난 다시 영화에 열정을 느꼈고 몇 달 후 군대에 가서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영화다. 나만의 역대 영화 베스트 10을 뽑으라면 무조건 1위는 <아비정전>이다. 그 다음 순위는 생각 좀 해봐야겠지만 1위는 변동의 여지가 없다.
요즘 영화학도들도 한 번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보다보면 이후 나온 한국 청춘 영화의 모델이 무슨 영화였는지 대충 감이 가리라 믿는다.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YEJE
2005.05.18 00:46
발 없는 새에 관한 이야기보다,
손목시계를 함께 들여다보며 장만옥에게 작업걸던 장국영의 눈빛보다,
새벽 공중전화 부스 근처를 맴돌던 유덕화의 쓸쓸한 어깨짓보다,
계단가에 서서 발랄히 춤을 춰보이던 유가령의 상처입은 미소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잊지 못합니다.

꼼꼼히 거울을 들여다보며 외출할 채비를 하고는,
방을 빠져나가던, 양조위의 모습.

양조위에 대한 찬사라기 보다는,
그렇게 아비정전을 마무리한 왕가위 감독에게 너무 감동해서.

그렇게 시작하고 그렇게 끝이나는 그 영화에 너무 가슴이 먹먹해져서..
괜히 또 욕 한번 하고 울어버렸던 기억이 있습니다.(너무 좋으면 감탄사처럼 욕이 나와요..) ^^;
truffaut
글쓴이
2005.05.26 14:43
물론입죠. 질투가 무의식적으로 발현해서 나오는 욕 아닐까요.
저도 뜻하지않게 좋은 작품 보면 욕이 나옵니다. "쓰발"하고
kelog
2008.03.01 20:08
아비정전 그다시 상영하고나서 마지막 장면 때문에(양조위 부분) 논란이 많았죠
그때문에 실질적으로 대중들에게 많이 사랑받지도 못했구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영화를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하는걸까요 ㅋ

중국소설 중에 아큐정전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마 그책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왕가위 감독이 만든게 아비정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큐정전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제목자체가 역설적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큐 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정전 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대단한 사람의 이야기라도 하는것 마냥.
아비정전도 마찬가지 겠죠?

아비정전 이라는 영화를 매우 좋아하시는거 같은데
시간나시면 아큐정전 이라는 책을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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