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카드' 제작일지2 "배우 좀 구경 시켜주세요"

yekam 2002.10.04 13:23:31
2002년 10월 3일 목요일 개천절 / 날씨: 짱짱하다 우중충해짐 / 촬영 12일전.

- 잠깐 비가 내렸습니다.
버스에 기대 음악을 들으며 몸뚱이 면적만큼이나 푸짐하게 맞을 비를 걱정하고 있었죠.
왠걸 노래한곡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젖은도로는 마를 채비를 하고 있더군요.

- 현재는 제목과의 전쟁입니다. 여러가지 후보가 나왔었죠.
처음 작가선생님이 붙이신 "작업" - 윤다훈이 유행시킨 비속어로 판명 받고 조기사망했습니다.
감독님이 만드신 "뛰지말고 걸어라" - 역시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 수준이셨습니다.
홍보팀에서 만들고 제가 적극 추천하는 "형사"(부제- 물러서지 않는 그들) - 전 이제 제일 맘에 듭니다. 왠지 솔직하고 무게있고 대박이 터질 제목같이 않습니까?
씨엔필름 장윤현 감독님이 만드신 "와일드 카드" - 역시 나무랄데없는 제목입니다. 형사들 거친 삶의 도박성, 범인을 잡기위한 마지막 히든카드....

- 꼬질꼬질 때묻은 시나리오를 만진게 2년 4개월하고도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긴장감 따윈 당췌~ 생겨나질 않습니다.
올해로 9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감독님이나 프로듀서나 저나 여유롭긴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내일 골프약속 있으시다며 마당에 나와 드라이버 들고 헛스윙 하시질 않나...
애인 선물 주러 진부(강원도)간다고 가방 들처 매고 집을 나서는 프로듀서나...
한심한 꼬락서니로 쪼그려 앉아 스타크래프나 하고있는 저나 여유롭긴 같아보입니다.
굳은 안면에 잠깐씩 스치는 조바심이 촬영을 보름도 남겨놓지 않은 그들의 변명이 되어주고 있는게 고작입니다.

- 변덕으로 따지면 팥쥐에미나 뺑덕어멈의 귀뺨머리를 처돌리는 수준인 감독님 때문에 3개월간 X뺑이 치면서 돌았던 헌팅이 거의 도루묵이 됐습니다.
처음 시나리오 작업시 언급했던 공간 컨셉이 모조리 뒤바뀌고 깐깐한 임재영기사님(조명)이나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는 변희성 기사님(촬영)의 겐세이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도대체 한번에 OK사인이 떨어지는 경우가 없더군요. 거기에 힘을 합세한 아트디렉터는 또 어떻구요.
꼰대들의 주된 제스추어가 도리도리와 절레절레입니다. 그로 인해 제작부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져있고 연출부 얼굴에 혈색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미치겠습니다.
죽어라 고생한 그들에게 던져지는 꼰대들의 합창은 "너 입봉하면 해" 입니다.
이 위대한 문장은 영화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그 시점부터 같이 해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장이죠.

- 몸뚱이 피곤한 노동은 할만 하고 버틸만 한데 정신력과의 다찌마리는 도통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버텨야 겠죠. 하루에 100통도 넘게 오는 매니지먼트와 오디션 배우들의 포화속에서도 잘 버텨오지 않았습니까.
선택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영화라는 작업은 선택의 연속이죠. 단 한순간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선택을 당하는게 선택을 하는것보다 낫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해준 캐스팅작업.
우와 열을 가리고 잘과 잘못을 가리는 일이 이렇게 잔인한 줄 알았다면 난 영화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뜯어봐도 영화는 미친짓입니다.

- 영화 초년생인 우리의 구염둥이 스크립터 명인이가 오늘 다부진 표정으로 한마디 건넵니다. "조감독님 양동근 언제와요?"
  우울합니다.

아직까지 주연배우 콧빼기도 구경 못해본 우울한 조감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