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눈사람 만들기

jelsomina jelsomina
2003년 02월 26일 02시 11분 17초 1435 3 3
봄날 촬영할 때 이런 고민이 있었다 ..
눈 내리는 소리가 있을까 없을까 ?
눈이 내리는 그림자가 창가에 비출까 안 비출까 ..

눈 내리는 소리는 성능 좋은 마이크로 잡으면 들린다고 하시는데 ..
아무리 들어봐야 장독대에 눈 내리는 소리는 안들리고...
믹싱은 괜히 있나 .. 내 귀로 안들리면 만들어 집어 넣으면 되지.
영화는 다분히 사기성이 짙다.

눈 내리는 풍경을 보게 되는 경우 중 제일 기분 좋은건..
이미 바닥에 많이 쌓일 정도로 펑펑 내리는 눈을, 기대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좋은게 .. 무심코 내다 본 창문 너머 ..마당으로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는
굵은 눈송이를 바라보는 것이다..

제일 싫은건 눈 내린 다음날, 눈이 녹을 때인데 .. 그건 생각하지 말자..
모든일에 장단점이 있는거니까 ..

상우가 은수랑 진짜 헤어지고 깊은 동면에 들어갈때 ..
사실은 상우가 잠든 문창살 너머 눈이 내리는 장면이 있었다
눈 그림자만 하염없이 ..내리는 장면이었는데 ..
그 장면 촬영에 큰 무리는 없었지만 .. 편집 때, 저런 닭살장면을 찍었다니.. 하면서
당연히 잘려나갔다.  

암튼
창문너머 "아~ 눈이 내리는 구나 .." 하는 느낌이 있고 ..
고만 그칠것 같은 눈이 그칠듯 그칠듯
힘겹게 내리다가 ..  펑 펑 내리기 시작한다면 ...?
보나마나 내일 아침이면 눈이 다 녹아 없어질것이다.

눈사람을 만들었던 건 아주 어릴 적인데 한 7살 정도 ?
7년이래 봤자 .. 제 기억을 가지고 있는건 고작해야 3년 정도 일것이다
아마 옛날에는 겨울에 눈이 참 많이 온 것 같다
3번의 경험으로 밤에 내린 눈은
늦잠자고 일어난 아침이면 다 녹아 없어진다는걸 알고 있었던 같으니까 ..

암튼 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면 더 기다리지는 말자.
마당에 내려서서 눈을 밟으면 뽀드득 뽀드득 신호가 온다 ..
이건 이제 눈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신호다 ..
혼자할 수도 있지만 혼자 하는건 좀 힘들다.
어디선가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하는 친구가 있을것이다
눈을 맞으면서 동네를 좀 돌아다녀본다

철수야 ~ 놀자 ...
"철수 밥먹는다.! " 철수엄마가 미워지기도 하지만 ..
철수만 있는건 아니다 .. 수철이도 있고
영희도 있고.. 희영이도 있다

조금 참고 동네를 돌아다며 보자 ..
한놈 쯤 나랑 비슷한 놈이 있기마련이다 ..

두 손으로 꼭꼭 눈을 뭉치고 .. 좀 더 크게 .. 좀 더 크게 .. 이런 방법도 있고
더 좋은건 안에다 연탄재를 집어넣어도 좋다.

주변에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가 굴러다니던 시절이라 쉽게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그게 쉬운것 만은 아니다.

이미 어른들이 .. 동네 어귀 언덕에다 연탄재란 연탄재는 죄다 가져다 깨버린 상황이 아마 대부분이었을것이다. 못된 어른들..
지금 생각하면 머 그다지 미운 짓은 아니지만 ..
푸대자루 하나만 있으면 하루 죙일 신나게 놀 수 있는 행복을 박탈당하는 기분은 정말 ...  

암튼 그렇게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가 눈에 띄지 않을때는 ..
방법이 있다.
부억 뒤켠에 가면 아직 까만 그대로의 상태인 연탄이 날 잡아 잡수 하고 기다리고 있는거다

근데 그건 왜 그렇게 무거운지..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는 아주 가볍다 ..

다 타버린 건 깨기도 쉽고 .. 적당한 크기로도 잘 부서지지만 ..
까만 원상태인 연탄은 정말 무겁기도 하고 ... 잘 깨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큰넘으로 눈사람의 알갱이를 만들려면 정말 힘이 든다.
눈이 잘 붙지도 않고 .. 굴리기도 힘들고 ..
그러다가 깨지기라도 하는날엔 ..
흰눈이 하얗게 덮힌 동네 골목길 가운데 보기 싫게 시커먼 연탄재가 깨진다고 생각해봐라 ..

정말 그보다 보기 싫은건 없다.
7살이지만 그정도의 미적 감각은 있었던것 같다.
누가 자빠지건 말건 .. 자빠지는 거야 어른들이지 .. 쪼그만 아이들은 잘 넘어지지도 않는다.

암튼 눈 사람을 만들때 명시할 점은 안에 무언가가 있는게 좋다.
만들기가 훨씬 쉽다 ..

그 안에 연탄재가 들었든 .. 돌맹이가 들었든 .. 무언가 있는게 좋다.
물론 다 만들어 놓은 눈사람을 바라보면서 ..
그 안에 든 연탄재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
살이 붙고 또 붙고 ..
때론 검은 흙이 묻어버려서 짜증도 나지만 ..

그거 아는지.. 만들어놓은 눈사람이 깨진걸 본적이 있다면 알텐데 ..
눈사람이 깨지면 그 안에 나무의 나이테 처럼 겹겹이 층이 있다..
눈이 30 cm 이상 정도 온것이라면 다르겠지만
보통은 눈 덩이를 굴릴때 바닥에 흙이 조금씩 묻어나기 마련이다..
눈덩이 하나씩 맡아서 굴리고 굴리고 ..

신발은 다 젖고 .. 벙어리 장갑도 다 젖어버리지만 ..
눈사람을 만드는데 그런거 신경쓰는건 엄마들이나 하는 짓이다
동상이 걸린다. 춥다 고만 들어와라 ..밥 먹어라 ..
왜들 그렇게 귀찮게 구는지

다 굴렸으면 큰일이 하나 남는다.
두개의 눈덩이 중 작은 놈을 올리는 일 ..

눈을 굴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엄청 크게 만들어져 어린애의 힘으론 도처히
몸통 위에 올려볼 생각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
그럴땐 형을 부를 수 밖에..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모자 하나 씌워놓고 ..
모자가 없으면 또 부엌에 가면 된다.
적당한 크기의 다라이 하나, 색깔 이쁜넘으로 하나 훔쳐다 머리에 씌워놓고

양쪽에 빗자루 하나씩 꼽고 ..
근데 빗자루 꼽을때 조심해야한다
잘못하면 빗자루 꼽다가 몸통이 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깨지면 .. 정말 얼마나 억울한지..

그렇다고 머 .. 아직 눈은 펑펑 내리고 ...
운이 좋으면 눈 사람 머리쪽을 올려주러 나온 형이랑 같이 만들 수도 있다.

한번은 그러다가 엄마만 빼놓고 온 식구가 나와서 눈 사람을 만든적도 있다.
물론 그 날밤 엄마의 수고를 지금은 생각할수 있었겠지만 ..
그 많은 빨래감들..

일단 빗자루를 성공적으로 박아넣으면
돌맹이도 좋고 .. 아까 잘못해서 깨져버린 까만 연탄재 작은 뭉치도 좋고 숯도 좋다
아무거나 줏어다 단추를 박아넣으면 아주 훌륭한 눈사람이 된다 ..

얼굴을 만드는 일은 나머지 각자 생각해보세요 ..

눈썹은 멀로 할지 .. 코는 ? 입은 ? ..

그렇게 밤이 가고 .. 엄마에게 끌려들어온 집안.
방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수증기가 가득찬 부엌에서 바로 빨가벗기우고
부엌 한 가운데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받아놓은 뜨거운 물속으로 끌려들어가  
머리를 감아주시는 엄마의 드센 손자락에 맡겨진 내 머리통이 이리 저리 흔들리면서도
영희와 만들어놓은 나의 눈사람을 누가 가져가기라도 할까봐 ..온통 그 걱정 뿐이었다

자다가도 일어나 창문 열고 내다보면 골목 가로등 밑에서
말없이 눈을 맞고 서서 나를 보며 웃어주던 나의 눈사람.
목도리를 해줄껄 그랬나 ...?

운이 좋게도 날이 추워서 며칠동안 골목을 지켜주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

햇볕이 들기 시작하는 다음날의 동네 골목의 상상은 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지금도 눈이 내리는게 싫다. 눈이 내리면 눈이 녹을 때가 있는걸 아니까
하얗게 뒤덮은 눈이 영영 녹지 않는 그런 곳에 가서 사는걸 꿈을 꿀 때도 있었는데

그렇게 나의 눈사람을 녹아 사라지게 만든 눈 온 후의 햇살이 나는 싫다
지금도 ..

지금이라면 사진이라도 하나 찍어놓았겠지만
그 당시 집에 사진기 있는 집은 정말 드물었다.
사진도 하나 없이 녹아서 사라져 간 그 수많은 나의 눈사람들 .. ..
.....
.....
요즘 눈이 많이 와서 눈사람을 만들고 ..
그래서..예전, 내 어린날의 눈사람이 다시 날 찾아올 수 있는거라면 좋겠다

정말 그때 사진기라도 하나 있어서 ..
내 옆에 친구처럼 웃고 선 눈사람의 사진을 하나 가질 수 있었다면 .. 그리고
어느날 짐정리 하다가 툭 튀어나온 그 사진을 바라볼 수 있는 행복을 가질 수 있다면 ..

내가 아이를 낳으면 꼭 같이 눈사람을 만들고 ..
내 아이보다 더 큰 눈사람을 만들어 내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놓고 싶다.

해마다 똑같은 모양의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
아이는 조금씩 커가겠지..
어느때부터인가 눈사람은 아이보다 키가 작아지고 ..

해마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친구를 기다리는 건 어떤 것일까
매해 겨울마다 다음번 겨울을 기약하며 녹아 없어지는 친구를 보내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






젤소미나 입니다.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so-simin
2003.02.26 18:36
그렇군 내게도 눈사람을 만들던 시절이 있었군....
눈 오는 날 그 시절을 떠 올리는
마리이야기의 주인공처럼. . .
applebox
2003.03.02 17:47
봄날을 보고난 후의 제가 감히 젤소미나님께 드리는 말씀...
정말 저는 상상도 못했어요..."눈이 내리는 소리에 대한 고민" 스스로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Profile
jelsomina
글쓴이
2003.03.03 01:49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봄날 작업때 본 자료 글중에 기억에 남는 글이 있는데요..
어느 일간지에 나왔던 관세음 보살에 관한 글이예요.

관세음 - 세상의 소리를 보는 보살이라는 뜻이라고..
"소리를 본다" 라

낙산사 관련 글이었는데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을 합니다.

소리를 본다는건 뭘까 ..

보길도 바닷가 이장집에서 민박을 하는데
바람이 많이 불었어요. 가을밤이었는데..

마을앞에 죽 늘어선 방풍림이 꽤 키가 컸었는데 ..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커다란 나무를 평상에 앉아 보면서 저런것도 소리를 보는것에 속할까 했죠..
내가 귀가 안들린다면 ..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면서 바람소릴 상상하지 않았을까 ,,, 싶은 ..
1 / 69
다음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