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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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천국

ty6646
2008년 03월 17일 08시 53분 42초 1738 2
한쪽이 깨어진 선풍기는 덜덜덜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혼자 돌아간다.
오전의 햇살은 창을 너머 들어오고 삐질삐질 땀을 내는 아내의 이마에 내 얼굴을 맞대고
한쪽 팔은 여전히 그녀의 몸을 감싸안은채 그렇게 두 사람은 잠을 자고 있다.

선풍기소리, 탁상시계소리,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자동차 경적소리....
96살 이 된 내가 60년 전으로 되돌아 와서 바라본 평화로운 어느 일요일 아침의 풍경이다.
그 풍경속에 60년전의 내가 어린 아내를 안고 그렇게 고른 잠을 자고 있다.

일은 힘들고, 통장 잔고는 비어있고,
방 한구석엔 점심용으로 보이는 빵 한두개가 뒹굴고 있다.
오래되어 떨어지고 너덜거리는 속옷과 수건들이 방한쪽에 널려있고,
먼지쌓인 커피병 뚜껑위로 수저하나가 놓여있다.

집앞에 세워진 배달용의 육중한 자전거위로는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쪼이고, 널어둔 빨래감위로는 잔잔한 바람이 타고 흐른다.
가물거리는 기억의 저편 60년전의 난, 내 어린 아내와 저렇게 살았나보다.
눈물이 흘러 갈라진 가슴안으로 스며들어간다.

내 이제 천국에 가겠다고 사자를 따라 나서다가
잠시 미련이 남아 되돌아 본 오래던 그 시절의 나와 아내의 모습....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알 수 있는걸 왜 그땐 몰랐을까.
그 시절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던 저 일상속의 풍경이 천국이었다는 것을....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sandman
2008.03.18 23:29
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이 내용과 느낌이 거의 같네요...

영화는 뭐...
묘한 ..
hermes
2008.03.19 03:56
알아버리셨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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