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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아는 분들이 있을까

2005년 02월 13일 02시 35분 00초 1720 2
김의철.jpg

김의철1.jpg

군에 가서 기타를 배웠는데,
근무가 없을때면 내무반에 항상 하나쯤 있던 낡은 기타를 붙잡고 퉁퉁 거리며 연습을 했더랬습니다.

그때는 때가 때인지라 민중가요책들이 막사에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그 노래책을 뒤적이며 알게된 이름이 김의철이죠.

제가 그때 참 좋아 하던 노래는 "이 땅의 축복 위하여" 였는데 그 노래들 아세요 ?

코드 몇개 외워서 만들어낸 어설픈 기타반주와
고참들을 붙잡고 알아낸 곡조로 따라부르던 그의 노래들
그후로도 아주 오래동안 흥얼거리며 지냈던것 같습니다.

언젠가 무더운날 지방에 혼자 다녀오면서 이광조의 노래들을 듣고 있었는데
"저하늘에 구름따라"가 나왔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고속도로 휴게소로 집입하다가 본 ...
장의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하얀 풍경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지친 기색으로 차에서 내려 그늘을 찾아가던 사람들.

그 옆을 지나는 제 차에선 "흙속으로 묻혀갈 나의 인생아 인생아 ~~~" 하는 가사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죠.
그냥 멍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지나다가 아차~ 싶어 음악소리를 줄였던 기억.

오늘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습니다.
몇몇노래들이 온라인에서도 남아있네요.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그때의 정서가 느껴집니다.

김민기랑도 비슷하고 양병집과도 비슷하고 한대수의 느낌도 납니다.

그 김의철 아저씨가 요새 어디선가 이런말을 했나봅니다.

“30여년전 그 때가 군사 독재 시대였지만 인정이 마르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사람을 믿지 못하는 시절이 아니었어요. 암울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답니다. 그때처럼 지금도 낮은 곳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어느덧 평범한 걸 하지 않으려는 시대가 돼버렸어요. 당장 인기를 얻는 음악을 하는 건 피해야 합니다. 잠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위선을 떨 수 있지만 그건 예술이 아닙니다. 자연의 소나무처럼 오래갈 수 있는 음악과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 영화하는 사람들도 새겨볼만한 말인것 같아서요.~

http://windbird.pe.kr/love_songs_kimeuicheol.htm
http://blog.naver.com/isky2002/2000586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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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기사에서 발췌.

지난 22일 오후 5시쯤 서울 명동 YWCA 1층 마루홀 무대에 포크 가수 김의철(52)이 올랐다. 그는 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불렀다. 100석 남짓한 어두운 공간에 퍼져 나가는 중저음의 울림. 참으로 이상한 건 처음엔 아무 생각없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감동이란 놈이 스멀스멀 가슴안으로 기어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저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인데, 호들갑을 떨거나 난리를 치는 것이 아닌데, 마음은 움직이고 있다.

장담컨대 인생에 있어 이런 경험은 몇년만에 한번 있는 것이고, 또 앞으로 몇십년은 기억되는 것이다. 그의 노래는 10여년전 영화 ‘백야’에서 러시아 가수 블라디미르 비쇼츠키가 불렀던 ‘뒷걸음치는 야생마’를 떠올리게 했다. 기껏해야 평생 서너번 들었을 뿐인 노래였지만 마치 죽어가는 야수의 울부짖음처럼 그 처절한 목소리와 기타 선율은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김의철의 노래는 이렇게 절규가 되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인의 한(恨)을, 한국인의 그리움을, 한국인의 서정을 노래하는 몇 안되는 가수들 중 한명이다.

“포크라는 음악은 외국 음악이 아니에요. 그 음악의 시작은 우리 조상들이 즐겨부르던 ‘뜸북새’나 ‘파랑새야’같은 노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학도가’나 ‘녹두장군’이 우리 포크 음악의 시초인거죠. 이 노래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난세의 노래라는 겁니다. 우리 민족이 겪었던 그 어려운 것들이 노래 마디마디 녹아있는 겁니다. 동네마다 떠도는 노래요,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바로 시대가 살아 숨쉬고 있는 음악이 포크입니다.”

김의철은 지난 30여년을 음악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다. 보성고 1학년때 가수 박인희가 DJ를 맡고 있던 ‘세븐틴’의 첫 방송에서 창작곡인 ‘저 하늘에 구름 따라’를 불러 대중음악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불행아’란 부제가 붙은 이 노래는 바로 서민들의 노래다. 너도 나도 곡괭이와 삽을 들고 앞으로 전진하자고 재촉하던 새마을 운동의 시대, 다음 끼니를 걱정하며 근근이 살았던 민중들의 노래다. 군사 정권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음지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동지들의 노래다.

‘저 하늘에 구름따라 흐르는 강물따라/정처없이 걷고만 싶구나/바람을 벗삼아 가면/눈앞에 떠오는 옛추억 아 그리워라/소나기 퍼붓는 거리를 나 홀로 외로이 걸으며/그리운 부모형제 다정한 옛친구/그러나 갈 수 없는 이 몸/홀로 가야할 길 찾아 헤매이나/헤어갈 나의 인생아/헤어갈 나의 인생아/헤어갈 나의 인생아’

그러나 선천적으로 음울했던 이 노래의 정서는 “말 잘 들어야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다”는 독재 정권의 가르침과는 현저히 동떨어져 있었다. 당시 이 노래가 실렸던 그의 데뷔 앨범은 검열이란 이름으로 난도질당했고, 음반제작사 측은 본인의 허락도 없이 제목과 가사를 수정해 앨범을 내놓았다. 한많은 인생살이를 노래한 탓에 한이 많아진 노래. 세상과 김의철을 이별하게 만든 노래이건만 양희은, 이광조, 김광석 등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리어져 대중이 가장 친숙하게 기억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노래의 정서는 가야할 곳이 어딘지 모른 채 가이없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새로운 세기의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생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노력과 부당한 세상을 향해 저항하는 힘이 긴 세월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의 데뷔 앨범은 최근 CD와 LP로 복각돼 재발매됐다.

“포크 정신에는 ‘도(道)’가 있지요. 포크 음악을 하는 사람 스스로가 남들이 눈여겨 봐주지 않는 곳에서, 어두운 구석에서 보헤미안처럼 살아가는 겁니다. 부와 명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음악들이 침해당해왔습니까. 포크란 부귀영화를 위해 음악을 팔아먹지 않는 순결한 사람들에 의해 이어져 가는 겁니다.”

이 땅에서 포크 음악을 웬만큼 한다는 이들 가운데 누구를 만나도 김의철이란 이름은 언제나 화제에 오른다. 그가 우리 포크 음악사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가 가져다 주는 무게감은 다만 음악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인간 됨됨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에게는 겸손의 미덕이 배어있다.

“그저 아름다운 인생을 살다 가고 싶은 겁니다. 그 매개체가 음악인거죠. 직접 노동을 하면서 자연의 섭리를 노래하는 거예요.”

김의철은 지난 73년부터 명동 가톨릭여학생 기숙사 내의 포크 동아리인 ‘해바라기’의 리더를 맡았다. 초기 ‘해바라기’는 노래로 의식화 운동을 했던 70년대의 또다른 청년문화의 산실이었다. 정권의 끄나풀인 정보원들이 이 곳에 상주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 김의철은 이들에게 목탁으로 얻어맞으며 협박을 받았다. 당시는 서울 시내 경찰서에 가면 학생들로부터 압수한 기타가 쌓여있던 시절이었다. 이 ‘멍청한’ 정권은 기타가 저항과 퇴폐의 상징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김의철은 성당과 가족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고 2년뒤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검열이 있는 한 자신이 음악을 할 수 없다고 판단, 80년 4월에 독일로 기약없는 여행을 떠난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래를 발표할 수 없게 됐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친누이가 사셔서 그냥 몇달 바람이나 쐬려고 간 거였는데 17년이 흘러버렸어요. 그 곳과 미국 뉴욕에서 클래식과 기타를 배운겁니다. 기타를 알면 좀더 좋은 작곡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그 곳에서 세계기타협회 회장이었던 스페인의 나바스코스와 전설적인 클래식 기타리스트 세고비아의 수제자 볼로틴으로부터 수없는 찬사를 듣는다. 하지만 이 얘기를 꺼냈더니 김의철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는 그들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볼로틴 선생은 81년 만났을 당시 73세의 중풍을 앓고 있는 노인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기술을 배운 게 아니라 감성을 배운 것입니다. 음악은 음(音)만 갖고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기술은 1%이고 99%는 그 사람의 사상과 감정인거죠. 인생이 서려 있는 겁니다.”

얼마전 독일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트’에 김의철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나치가 600여명의 저능아를 집단 살해한 것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열리는 추모회에서 전세계 장례곡 가운데 김의철의 노래가 선곡돼 91년부터 빠짐없이 불려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는 그가 친누이를 위해 만든 노래였다. 그는 지난 96년 귀국해 양희은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또 YWCA 청개구리 포크 공연을 부활시켜 방의경, 이성원, 김두수, 김광희, 박영애, 양병집, 윤연선, 이용복, 서유석 등 20여명의 포크 가수들이 무대에 올랐다. 그는 포크 전문 음반제작사 ‘솟대’의 대표이기도 하다.

이승형기자 lsh@munhwa.co.kr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anonymous
글쓴이
2005.02.13 20:27
사람들은 아름다웠지만 제도는 아름답지 못했던 시대였죠.
사람을 사람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억압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람으로 남아있기 위해 발버둥쳤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거 아닐까요.

'불행아'의 원래 가사는 "묻혀갈 나의 인생아"가 아니라 "헤어갈 나의 인생아"였나보군요.
anonymous
글쓴이
2005.02.17 03:18
김의철씨.. 한동안 한국에 안계셨었죠...
제가 좋아하던 노래는 섬소년......이었던가.........아세요?

이광조의 그 테잎이 기억이 나네요...
쌩뚱맞은...테잎....
그 차는 라디오가 안 나왔으므로...테잎밖에 들을수 없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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