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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개봉작 <벗어날 탈 脫>을 연출한 서보형입니다

ssabotagefilm
2024년 03월 01일 04시 03분 37초 51746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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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벗어날 탈 脫>을 연출한 서보형입니다.

 

불교에는 선문답이라는 묘한 대화법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 사이 혹은 아직 깨치지 못한 스님과 깨친 스님 사이에 문답이 이루어지는 형식인데, 대부분 동문서답처럼 보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하는 식입니다.

 

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모든 부처가 나온 곳은 어디입니까?”

운문 스님이 답합니다.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동쪽 산이 물 위로 간다는 뜻입니다. 왜 운문 스님은 이런 알쏭달쏭한 말을 했을까요? 선문답에서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동산수상행’이란 말이 가진 시적 이미지가 저는 좋았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산이 물 위를 가다니요. 상상해 보면 무척 재밌는 그림입니다.

 

어느날, 저희 집 아파트 근처를 산책하는데 새벽에 비가 왔었는지 물웅덩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무심결에 물웅덩이를 지나가면서 그 속에 비친 아파트를 보았습니다. ‘어? 아파트가 움직이네?’ 물론 움직이는 것은 저지만, 나를 잊고 눈에 보이는 실상 그대로를 묘사하자면, 분명 아파트가 물 위를 갑니다. 운문 스님도 아마 제자와 걸으시면서 물 위에 비친 산을 보지 않았을까요? 분별심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산도 아파트도 물 위를 갑니다.

 

제가 본 가장 재밌는 선문답을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깨달음이 뭔지 묻는 젊은 스님의 말에 깨친 노스님은 밥상을 엎었다고 합니다. 질문할 때마다 밥상을 엎어서 젊은 스님은 밥상머리에서는 질문을 하지 말아야지 합니다. 치울 때마다 곤욕이었으니까요. 다음 공양 때 젊은 스님은 질문을 꾹 참고 조용히 밥을 먹었습니다. 그러자 노스님이 왜 질문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깨치지 못한 스님은 또 밥상을 엎으실까 봐 질문을 못하겠습니다고 합니다. 그러자 깨친 스님은 이번엔 내가 밥상을 엎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여 젊은 스님은 노스님이 못 미덥지만,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질문을 합니다.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깨친 스님은 밥상을 엎으려고 상 다리를 쥐는데, 깨치지 못한 스님은 워낙 이골이 나 있어서 재빨리 반응을 해 밥상을 온몸으로 움켜쥡니다. 밥상을 엎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둘은 대치 상황이 됩니다. 깨치지 못한 스님은 말합니다.

 

“스님, 밥상은 죄가 없습니다!”

“밥상도 죄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젊은 스님은 악에 받쳐서 외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스님도 소리를 지르며 되받아치십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순간, 젊은 스님은 벼락에 맞은 듯 온몸에 힘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밥상은 엎어집니다. 하지만, 젊은 스님은 큰 파도를 맞은 듯 아주 시원해집니다. 비로소, 젊은 스님은 미혹에서 벗어납니다. 엎어진 밥상 앞에서 젊은 스님은 노스님에게 큰절을 합니다.

 

재밌지 않나요?

 

이 이야기는 사실 그냥 생각이 나서 한번 지어봤습니다. 그래도 선문답의 핵심을 담고자 했습니다. <벗어날 탈 脫>도 아마 같은 마음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게 아니겠냐고 저는 아직 믿고 있습니다.

 

<벗어날 탈 脫> 이 2월 21일에 개봉했습니다. 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된 이후에 3년 만인데요. 독립영화 주류가 선호하는 주제도 표현방식도 아니어서 개봉지원금조차 받지 못 한 채 어렵게 개봉했습니다. 개봉관 수가 턱없이 부족한데 그마저 개봉 주가 지나 반 토막이 났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아쉽습니다.

 

이 영화는 꼭 극장에서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로베르 브레송 감독이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에서 “시네마토그래프는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로 쓴 것(écriture)이다” 라고 말했듯이, 이 영화의 색, 앵글, 카메라의 움직임과 사운드에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또한 주연을 맡아주신 임호준 배우의 말을 빌리자면, 본 적이 없는 전무후무한 영화니까요.

 

다양한 GV 행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특히 3.1절인 오늘, 서울 정동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 관람 후 감독인 저와 출연 배우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GV가 마련 되어 있습니다.

 

꼭 극장에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벗어날 탈 脫 메인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TzJCDF9Xif8&t=3s

 

09NotOneAndNotTwo_09.jpg

 

輔炯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농담12
2024.03.24 20:23
와 최근에 극장에서 보고 여운 길게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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