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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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영화인이라는 죄는 달게 받아야지...

zampano
2000년 05월 10일 12시 06분 48초 2317 19
  오늘도 무거운 마음으로 영화사를 향한다.
이 무기력함이 부디 내 자신이 시발점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헛발걸음이 헛발걸음이 주욱~ 이어져서 자꾸 해를 넘긴다. 스물 아홉살,그해 마지막 날에 삼십이 된다는 사실에, 또 보이지 않는 내 꿈의 세계가 얄미워 우황청심환을 넘겨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그런데로 이제 삼십 중반이다.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잔 먹으려던 중에 후배한테 전화가 왔다.

  형 캐스팅 어떻게 됐어요?
  ...휴우~~힘들어. 니네는?
  우리도요 ...위험해요

뭐 요는 누군 누가 잡고 있고 어디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누구 계열이며 작품을 고른다는 둥 그런 얘기들이다. 그친구 팀이나 우리 팀이나 배우만 있으면 들어갈 것 같다. 그러나 배우가 없으면 힘들 것 같다.

난 영화인이라는 사실이 좋다. 사람들은 나로 인해 내가 작품을 안해도 꿈을 먹는다. 그건 내가 어설픈 영화를 만든 것 이상의 대단한 효과이다. 그 효과는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대리 만족형으로
   "너는 그래도 꿈을 먹고 사는 놈이야.순수한 놈이지, 난 네가 부러워"
  둘째는 주로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며 표본형이다.
   "저자식같이 살면 안된다. 마음 굳게 먹어야 해 차칫하면 쪽박 찬다, 꿈 좋아하네       누구는 꿈없냐? 웃기는 자식아"

이래 저래 효과는 대단하다. 그러므로 나는 충분한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다만 부모에게 일반적 형태의 자식들이 하는 행동을 전혀 못 해드리는 게 죄송하다. 집안의 누가 결혼을 했는지, 언제 제사인지, 언제가  당신 생신인지. 어쩔때는 조카 이름도 모르겠다. 물론 조카도 내가 삼촌인지 모른다.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존재인데...

그래도 나는 좋은 스탭과 동료들을 보면 같이 희망을 보며 즐거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영화 할란다.
그리고 이제는 딴게 할게 없다. 여기에 다 쏟아부어서 돌아갈때도 없고 쉴 때도 없다.
더구나 아직도 영화보다 사랑스럽고 좋은게 없어서 그만두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요즘 스탭(?)이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몇년씩 시나리오 쓰고 준비 다 해 놓고 시작할려고 하면 배우가 안 되고 제작자가 안 된다고 하고 배급자가 안 된다고 하고 매니져가 안 된다고 한다. 스탭들만 같이 한번 멋지게 해보자고 한다.

우리가 영화를 왜 할까요? 배우가 연기를 왜 할까요?

돈과 정치가 영화판에서 너무 활개를 친다. 물론 잘 하는 거다, 옛날같이 정에 끌리고 뭐에 끌리고 해서 대충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겠지 싶다. 그러나 술 한잔 마시다 형 이런거 한 번 찍읍시다. 좋아 임마.. 그리고 밤새 술먹고 남들 출근할때 어깨 끌어안고 휘청휘청 걸어가는 낭만은 정말로 필요없는 것 일까? 한 작품하면 내가, 또는 우리 회사가 얼마나 이익을 볼까, 얼마나 손해를 볼까... 진정 그런 것만이 가치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걸까?

  혹시 다른 스탭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비도 오고 너무 우울한 마음에 일부러 밝게 쓰려던게 오히려 청승을 떨었나 보다.

사랑하는 우리 영화인들 힘들 내시고 오늘은 술도 오는 데 소주 한잔 씩들 하세요.
내일 이야기 하면서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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