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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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근성

hal9000 hal9000
2000년 05월 31일 23시 39분 59초 1222 4
여행을 마치며.

그곳에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말을 걸어온다. 한명, 두명... 열명이 넘어선다.
하나하나 얘기를 주고 받고 일일이 안부를 물으며
또 다시 다른 사람을 대면한다. 스무명이 너머선다.

산 정상이다.
눈이 많이 와 있다. 바람이 너무 차다.
저 멀리로 소도시가 보이고 눈은 계속 내리고 있다.
해가 거의 다 져간다. 어둑어둑한 시간에 그곳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눈이 숨긴 바닥의 얼음에 무릎도 시큰 거리고
심지어 그 시간에 산을 오르는 사람을 봤으때는
조심하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흔들리는 차에서 깜박 졸았다.
채 다 자지못하고 잠을 깨면 머리가 아프다.
그러고 보니 가방의 부피가 출발할 때 보다 줄었다.
잠결만 아니라면 산 정상에 물통을 두고온게 틀림없다.

학생 시절에 여름 도시락에는
얼음을 꽝꽝 얼린 물통이 추가된다.
한번은 물통을 떨어 뜨려서 가는 금이가며 못 쓰게 되었다.
그 날 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서 산 물통이었다.
그 참 오래 쓴 물통이었는데.

보따리를 쥔 할머니와 함께 시외버스에서 내렸다.
시계를 보니 10분 쯤 졸았나 보다.
길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다시 버스를 기다린다.
보따리를 쥔 할머니가 나를 한번 보시고는 논길로 접어든다.
바람이 많이 부는 이런 겨울에는 장갑 안끼는 습관에
항상 후회를 한다.

주머니에 손을 푹 넣고 눈이 날아 올때는 몸을 움크리고 등을 보인다.
등 뒤에 구멍가게에서 아저씨가 나오고 버스는 끊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홉시도 되지 않았고 추운 건 버틸 만 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차가 고개를 넘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어딜 갈거냐고
나한테 묻는 아저씨.
나는 그 산 이름을 몰랐다.

바닥에 붙은 종이에 호빵이 많이 묻어 떨어지는건 항상 아깝다.
검은 고무줄에 묶인 병따개로 사이다를 따는 아저씨는
막 들어온 다른 아저씨를 난로가로 부른다.
병따개가 철제 책상에 부딪혀 팅팅 쇠소리를 낸다.
호빵 두개와 사이다 한 병을 계산하고
겨우 따뜻해진 몸을 여관까지 겨우 옮겼다.
여관 입구의 큰 거울에 볼이 빨간 내가 보였다.
아, 불타는 귀!

불을 끄고 누워서 억지로 천장을 쳐다봤다.
이렇게 어두울때 내 동공은 얼마나 확대 되었을까.
볼 수는 없었지만 매번 궁금해 하던것을 또 느꼈다.
여관 방 하나에 혼자 자기에는 넓다고 생각이 든다.
자는 동안 난 이방 전체를 이용 할 수 있을까.

창문이 덜컹 거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 보았다.
역시 학교가 보이는 소도시의 겨울 아침 다운 모습이었다.
어제 들른 구멍가게가 보였고 그 앞 버스 정류장에
두어 명 사람이 있는 것도 보였다.
밤새 제설작업이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땅은 녹은 눈과 흙으로 질척하고
역시 버스의 바닥은
차고에서 청소한 노고가 무실하게 금방 지저분해 졌다.
시외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으면
차의 바닥도 보이고 운전기사의 얼굴도 보이고 가는 길도 보인다.

목적을 가지고 산을 오르기가 쉽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아마츄어의 산길은 산정상을 위해 놓여 있지 않은 듯 하다.
왜 다시 이 산을 올라야 하지.

다시 산정상이다.
어제처럼 호연지기를 생각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므로 어제 내가 서있던 곳을 바로 찾아갔다.
멀리 학교가 있는 소도시가 보이는 곳에는
눈에 반쯤 묻힌 물통도 있었다.
땀이 식어가고 있었다.
물통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한번 쳐다봤다.
물통 표면에 물방울들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밤이 되어서야
고속의 버스는 서울의 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지방에서 서울에 도착하는 경우는 대부분 어두울 때가 많다.
약간 피곤한 이 상태와
다시 집으로 돌아갈 마지막 노선이 머리에서 떠오른다.
이 때 서울은 밤의 도시 답다는 생각도 든다.
아주 극단적으로 어둡고 밝은 것만 보이는 서울로
내리기 전에 다시 가방을 확인한다.
또 다시 물통이 없다면 큰일이므로
나는 항상 마지막에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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