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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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이른봄 어느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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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3월 16일 21시 10분 02초 1314 2
전철을 타고 가던 그 남자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다.
내내 빈 자리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 남자는 출입문 앞에 서서
문 가운데의 검은 고무띠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멀리 걸어나갔으나 마음에 드는 곳은 찾지 못하였다.
그 지난함을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어이없이 지쳤다.

전철역에는 새로, 한 칸에 한 사람만 설 수 있는,
폭이 좁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냉장고 안에서 반찬통을 꺼내 늘어놓고
밥통에서 밥을 떴다. 밥그릇에는 싫어하는 검정콩을 일부러 많이 담는다.
손에 젓가락을 말아쥐고 가 텔레비전을 켜고 다시 돌아와 앉았다.
강당에 모인 여학교 학생들이
<진짜 사나이>에 딴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자막. 과연 보라는 골든벨을 울릴 수 있을 것인가.
막대 끝에 달린 카메라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 큰 강당 바닥에 무릎을 꿇고 혼자 앉은 보라 학생을 비추었다.
이번에는 문제 대신 음악을 길게 들려주었다. 귀에 익은 피아노 곡이었다.
이것은 낭만파시대에 주로 피아노를 위하여 작곡된 소곡으로,
쇼팽에 의해서 정교하고 세련된 피아노소품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천천히 꿈을 꾸는 듯한 오른손의 가락.
그 남자 속에서 그가 씹어 넘긴 무엇도 아닌 것이 울컥하였다.
그래서 그 남자는 조금 당황하게 되었다.
보라 학생이 화이트보드를 들자 여자 아나운서가 말한다.
정답은, 야상곡입니다.
설거지하는 동안, 어디서 다쳤는지 모르는 왼손 엄지의 상처가 너무 아파서 그 남자는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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