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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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국밥집 부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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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6월 13일 02시 29분 04초 1380 12




대동 방앗간에서 짜낸 고추씨 기름은 육개장이나
잡채 만들때 꼭 넣어야만 되니까.
꼭 그렇게 방앗간 갔다 오는 길이면 맞은편 석유집 막네 아들을
기어이 한번은 놀리고 집으로 뛰어 들어온다.

그 석유집 아들 구자춘은 항상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놀리고 자빠진다.
여덟살인 내가 보기에 그 구자춘은 항상 비실비실 웃으며 길거리에 서서
혼자 중얼거리고 박수도 치고 어쩔때는 소리도 질렀다.
혀가 두꺼워서 입도 꽉 다물지 못하는 구자춘은 지나가던 사람들과 서로 마주보며
서로 측은해 하는걸 즐겼다.
내가 놀리러 앞에 가서 서면 왜 나를 좋아하는 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구자춘은 손뼉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보고 선다.
내 뺨을 만지려고 손을 뻗는 순간이 내가 항상 구자춘을 놀리는 타이밍 이었다.
손이 내 뺨에 닿으려는 찰나에 우리동네 바보라고 놀리고는
냅다 집을 향해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간다.
그러면 유일하게 구자춘을 돌보는 할머니가 역정을 내시며 달려 나온다.
전에는 한번 붙들렸다가 호되게 혼난 경험도 있었으니까
또 걸리면 엉덩이도 맞을테고 어쩌면 고추씨 기름까지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근처에는 동네에서는 유명한 국밥집이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삼촌 손에 이끌려 그 국밥집에 처음 들어가 보게 되었다.
그때 기억으로는 다 별로였다. 순대며 내장이 국물속에 들어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고 내 옥토끼 포크 겸 숟가락으로 먹지 못한다는 것도 기분 나빴고
소주냄세 막걸리 냄세 찌든 벽 마다의 얼룩진 도배지 냄세도 마음에 안 들었다.
결정적으로 구자춘이 할머니 허리의 끈을 잡고 가게로 들어와서
구석 식탁에 앉았을 때 였다.
난 대강 할머니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눈에는 노기가 없었다. 할머니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그 당시 대학생 정도되는 어느 예쁜 누나가 문을 드륵 열고 들어오더니
구자춘과 할머니의 식탁에 앉는 것이었다. 세사람이 더운 김 올라오는 국밥을
맛있게 먹는다.
구자춘은 흘리는 거 반에 땀으로 얼굴이 세수를 한 듯 했다.
한 술을 떠 먹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히- 웃고 또 한 술 다시 떠먹고
예쁜 누나한테 '누나-' 하고는 또 헤- 웃고.
할머니가 구자춘을 밥 다 흘린다며 혼내는 와중에 예쁜 구자춘의 누나는
그의 얼굴을 향기나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준다.
그래도 구자춘은 얼굴을 닦이면서 동시에
국밥을 여지없이 흘리며 떠 먹는 웃음.
구자춘에게 저런 예쁜 누나가 있는줄 처음 알았지.

그 국밥집은 할머니의 아들이자 구자춘과 예쁜 누나의 아버지께서 꾸리시는 식당이었다.
그런데 삼촌은 밥 먹다말고 왜 구자춘의 누나를 처다보고 있을까?

얼마 전 TV 어느 프로에서 그 집이 맛있는 집이라하여 소개가 되어
그때 그 벽지하나 변함없이 화면 가득 흐르고 있었다.
음식 만드는 비법을 묻는 리포터의 말에 웃으며 넘기는
아저씨 모습과 옆에서 같이 즐거워 하시는 할머니 모습도.
구자춘은 화면에 나오지는 않았다.
더러는 걱정이 되지도 않는 것이 분명히 건강하게 잘 있기 때문에 생길수 있는
할머니의 웃는 모습이었다.
구자춘이 왜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놀리는지 이제야 감이 오는데 말이야.
그런 구자춘은 건강 할 테지.
그럼 구자춘의 예쁜 누나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
나는 이제 그 국밥집 큰 따님을 처음 봤을때의 나이가 되었는데.
국밥도 자주 먹고 술, 담배 찌든 벽지를 좋아 할 만합니다 이제.

  
  그 국밥집 큰 따님, 아직도 건강하시죠?
  네, 저도 건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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