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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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엽기적인 그녀

vincent
2001년 07월 27일 18시 03분 39초 1140 1 5


에피소드 1.

조카는, 요즘 물어보는게 많아졌다. 석달 있으면 두 돌이 되는 여자 아이들은 다 이렇게 호기심이 많은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저랑 놀지 않고 작업(?)을 하는 중이거나 책이나 신문이라도 뒤적거리고 있으면 얼굴을 쏙 내밀고는 어디서 익혔는지 모를 질문을 한다.
"고모~ 뭐해~?"
설명해줘도 알아들을리 없는 아이에게 무심히 설명을 한다.
"고모 일 해."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다시 묻는다.
"뭐해?"
그제서야 아이가 궁금해하는게 아니라 끼어들고 싶어한다는걸 눈치 채고는 무릎 위에 앉혀서 노트북 모니터에 촘촘하게 떠 있는 문장들을 대면시킨다.
"뭐야?"
녀석이 또 묻는다. 다시 소용도 없을 설명을 하려는데, 순식간에 와락- 자판에 달려드는 조그만 손. 이내- 화면은 하얗게 되고, 내 얼굴도 하얗게(?) 질린다.
눈치 빠른 아이가 내 표정을 살피고는 얼굴을 부비며 헤헤-댄다. 그 얼굴을 보고, 그저 바보 같이 웃어버리는 나.
..... 20씬이 날아가버렸다.


에피소드 2.

배달된지 며칠이 지나도록 못읽은 이번 주 씨네21을 뒤적이고 있는데,  조카가 콩콩대며 뛰어온다.
"고모 뭐 해?"
책장과 결투라도 하는듯 찢어낸 몇 번의 전력이 있기 때문에 책을 뒤로 감추자 아이는 상냥하게 웃으며 내 무릎 위에 앉는다. 그림책을 읽어주길 기다리는 아이처럼 가만히 있다.
책을 다시 펼치자, 아이는 피어싱을 한 남자의 얼굴로 채워진 책장을 보고는 눈을 가리며 무서워하는 시늉을 한다. 그래, 얼른 책장을 넘겼는데 <캣츠 앤 독스> 광고가 나온다. 아이는 환히 웃으며 개를 가리키더니 한껏 애교를 떨며 말한다.
"고모~ 아도."
입모양만 보고 말을 배우느라, 아이는 종종 자음을 빼먹는다. 이건, 다시 말해 "고모 사줘"로 통역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서둘러 책장을 넘기다가 이번엔 <엽기적인 그녀> 리뷰 기사가 펼쳐졌다. 아이는 저도 여자라고 용케 전지현을 비껴 차태현을 가리킨다.
"고모~ 아도!"
아이에게 '차태현'은 살 수 있는게 아니라는걸 손짓발짓 섞어가며 10분쯤 진땀 내가며 설명했다. 말똥말똥 쳐다보던 아이는 갑자기 다 알아들은 듯 보조개 패이는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내 뺨을 톡톡 치더니 이랬다.
"이뽀~"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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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9000
2001.07.28 05:59
나중에 조카는, 그렇게 배운 활자를 이용해서 좋은 책한권 고모한테 사 드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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