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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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아빠에 대한 단상.

mee4004
2001년 08월 07일 00시 17분 20초 1166 1 4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부르는) 4학년땐가 5학년땐가
어떤 계기였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아빠에 대한 호칭을 '아버지'로 바꾸겠다고 결심하고 "아버지" 라고 했을때,
아빠는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갑자기 퍽 늙은 듯한 생각이 든다며 몹시 섭섭해 하셨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은 철딱서니 없어보이게 여전히 "아빠!" 다.

왜 그랬는지...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빠랑 종로3가에서 장충공원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한시간 반쯤 걸었던거 같다.
무척 더웠고, 장충공원에 왔을 때는 저녁무렵이였는데 쮸쮸바를 먹었던 것 같다.  아빠는 아실까?
내내 나는 아빠 손을 꼬옥 잡고 왔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래도록 아빠와의 그 데이트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스물넷에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을때,
그사람을 집에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아빠의 첫번째 대답은 "만나고 싶지 않다" 였다.
나는 무척 화를 냈지만, 엄마가 그랬다.  서운하신가 보다고.
나중에 "신부의 아버지"란 영화를 보면서 아빠가 생각났다.

결혼하겠다던 친구와 깨지고 나서,
우연히 그 친구를 다시 만났을때.. 그친구가 나와 헤어진 후에
아빠를 한번 만났단 이야길 했다.
나는 펄쩍뛰며 그 친구에게 ' 왜 우리 아빨 만나느냐?'며 따졌다.
그친구는 아빠가 자길 찾아오신거라며,
' 내가 딸을 잘못 키워서 너한테 상처를 주게되어 미안하다.' 라고 하셨다고 했다.
평생 아빠한테 마음의 빚을 갖게 되었다.

얼마전에 느닷없이 TV를 보다가 아빠가 그리웠다.
아빠 핸드폰으로 전활 걸었다. (밤 열한시가 다 된 시간)
생전 안하던 짓(평소에는 집으로 전활 한다든가 엄마한테만 전활한다)을 하니까 아빠가 너무 놀래셨다. (얘가 뭔일이 있나 하고)
'아빠가 너무 보고싶어서' 그랬더니 금방 목소리가 축축해 지시면서 '엄마 생일. 잊지말고 집에 오라' 그러곤 끊으셨다.

...며칠전 아빠 생신이셨다.
난 케잌을 사갔는데 초 갯수도 틀리게 가져갔다.
아빠는 이제는 결혼하란 말도 안하신다.
그저 집에 자주 못가는 내가 가끔 집으로 전활하면
'누구십니까? 전화 잘못하셨다 봅니다.  저는 딸이 하나 밖에 없는대요 ' 하시면서 서운함을 농담으로 전하신다.

한번쯤은 아빠하고 팔짱끼고 영화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가물가물 어릴때 아빠하고 극장에서 봤던 서부영화들이라도 추억하면서 말이다.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akdong
2001.08.07 01:41
딸내미 보고싶으셔서 가끔 상경하시는 아빠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수다를 떤다.
흐뭇해하시면서 토닥거려주시는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주름살이 눈에 띄어 가슴이 아프다.

고등학교때 사춘기라는 허울좋은 이름하에 반항하던 시절..
당신 딸의 또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으시곤 차를 몰고 잠시 나가셨던 아빠..
그렇게 아빠가 나가신채 보낸 하루저녁...
사고라도 난건 아닌지 걱정하시는 엄마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는 단지 철이 없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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