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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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유고에서 온 편지

jelsomina jelsomina
2001년 10월 07일 00시 15분 51초 1459 1 11


97년 어느날이었다.

지금은 일반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낯설기만 했던 인스턴트 메시징서비스인 ICQ라는
것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얘기다.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열심히 웹서핑을 하던 중 ICQ에서 노란 메시지가 하나 날라왔다.

ICQ를 통해서 미국, 홍콩, 호주 등의 몇몇 친구들과 얘기를 나눠봤지만 당시 이미 채
팅의 뻔한 대화에 쪄들어 있던 나로서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유고라는 쉽게
접해보지 못한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난 함께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GOGA IVANOVIC, 당시 나이 23세의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한 여
대생이었다.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발랑까진 여자애들과는 달리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
는 그녀와의 대화는 즐거움을 넘어 신비롭기 까지 했다. 그녀는 인터넷 자체를 매우
생소하게 여겼으며 이렇게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 나누는 일 조차 처음이라며 나를 매
우 소중하게 여겨주었다.

심지어 그녀와 내가 대화를 나눌 때면 그녀의 친구와 가족들이 모니터 주위에 둘러 앉
아 우리의 대화를 구경했으며 나와 간접적으로 인사를 나누기까지 했다.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 졌고 서로 사진과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서로
의 목소리가 궁금해 전화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대화를 나눌 때 마다 언제 유고에 놀
러 올꺼냐며 나를 얼른 오라고 졸라대곤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 IMF가 찾아 왔었고 우리가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위기에 대해 진심어
린 걱정을 해주었으며 당시 취업 준비를 하던 나에게 많은 용기를 주기도 했다.

물론 그녀도 그녀의 나라가 겪는 아픔에서 부터 개인의 고민거리 까지 털어놓을 만큼
우리는 국경을 넘어서 서로를 이해하며 믿어왔다. 어쩌면 지리적으로 강대국들 틈에
끼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왔던 역사적 배경과 아픔이 서로 비슷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99년 봄...

미국을 위시로 한 나토군이 드디어 유고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과연 미국과 나토
가 그렇게 공격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몰랐었다. 다만, 난 세르비안 친구
를 두고 있었고 그녀의 안전이 걱정되었으며 그녀의 안녕을 위협하는 그들이 원망스러
웠을 뿐이다.

그 혼란의 와중에 가까스로 그녀와 채팅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들 방
공호(Shelter)에 피해 있었고 오직 그녀만이 집에 혼자 남아 불을 꺼놓은채 숨죽이며
이렇게 채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저 멀리서는 폭탄이 왔다갔다 한다고도 했다. 위험한데 너도 피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나는 용감하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런 그녀가 무모
해 보이기만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민간인을 향한 나토와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에 대한 순진했던 그녀만의 저항 방법이었던 거 같다.

걱정이 많이 되긴 했지만,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난 그녀가 죽었는지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다만 그 이후 그녀는 다시는 ICQ에 접속하
지 않았으며 편지를 해도 답장이 없고 내가 알던 그녀의 기숙사 전화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 전쟁 와중 그녀가 보낸 마지막 E-MAIL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음은 그녀가 보
낸 마지막 편지다.


(편집자 주 - 반말로 번역함)

한동안 소식 못 줘서 미안해. 컴을 아직 고치지 못했는데다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폭
탄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 여긴 모든 게 혼란스러워.

많은 사람들이 밤낮으로 숨어있어. 나도 그렇고 모두가 평상시처럼 살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해. 난 자주 밖으로 나가서 걸어다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다들 굉장히 두려워하지만 애써 그 감정을 숨길만큼 용감하기도 해.

내 생각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지금 여기서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새로운 세계 질서"라는 걸 우리가 허물어뜨리든지, 아니면 그 질서가 우리
의 불행 위에 세워지든지, 둘 중 하나인 것 같거든.

나는 공습경보가 울릴 때마다 우리 가족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 여기
Krusevac도 그렇고 베오그라드에서도 그렇고, 일종의 항의시위로 사람들이 락이나 컨
트리 뮤직 콘서트를 열고 있어. 그들의 항의 메시지들은 대개 재미있는 것들이야. 예
를 들어 이런 거지. "미안해. 그게 안 보이는 건지 몰랐어" (F117A 스텔스기가 떨어지
는 걸 조롱하는 의미)

나토 비행기들이 우리 집 위로 밤낮으로 날아다니고, 저 멀리서 꽝 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와.

목요일 밤엔 그 소리가 굉장히 컸어. 베오그라드에 사는 내 친구는 미사일이 자기가
사는 빌딩 위로 지나가서 100미터 뒤에서 터지는 걸 봤대. 한 남자가 거기서 죽는 것
도. 그렇지만 민간인들이 그렇게 죽어간다는 걸 아무리 얘기해도 다른 나라 뉴스에는
절대로 안 나오거든.

적들은 "cassete bomb"을 떨어뜨리고 있는데 이건 국제법에 의해서 금지된 거야. 생
각 좀 해 봐. 우리는 아주 작은 나라인데, 이런 나라가 어떻게 세계 질서를 붕괴시키
고 재앙을 불러오겠어?

그건 누군가의 상상에 불과할 뿐이야. 우리는 다른 유럽 나라들처럼 아주 오래된 나라
야. 벌써 1389년에 코소보 때문에 싸우고 있었다구. 콜럼버스가 실수로 미 대륙을 발
견하기도 전이지.

이런 얘기를 너무 많이 써서 미안해. 하지만 우리나라가 사악하고 나쁘다고 선전해대
는 외국 미디어들 때문에 너무 화가 나. 우리의 죄라면 지리적으로 전략적으로 요충지
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없어.

다음에 시간이 나면 꼭 다시 쓴다고 약속할께.

너의 Goga.



Sorry I haven't left you any message lately; my computer is not repaired yet,
and i'm not in a position of writing now when i'm trying to save my mind which
is going crazy because of constant hearing voices of falling bombs. It's a big
confusion here about everything.

Many people are hiding themselves day and night, and lots of them, like myself
are trying to live normaly which is not possible. I'm often leaving house,
walking arround, watching people who are very afraid but they bravely hide that
feeling from others.

In my "historical" opinion, now is happening something big on this teritory:
either we are breaking down the "new world order", or that institution is
building itself on our misery.

I'm trying to come down my family every time we hear warning for emergency.
Every day, here in Krusevac like in Belgrade, people are organizing rock pop
and country music concerts in order to make their protest to the world.They
make protest transparents with massages like this one: "SORRY,WE DIDN'T KNOW IT
WAS INVISIBLE" and others humorous as this one (this massage explains, how
F117A fell down).

The NATO airplains are flying every day and night over our homes, and I can
hear clearly in the distance something like "BOOOM".

On Thursday night it was very loud. My friend in Belgrade saw the missle flying
over her building,which exploded 100 meters behind her building, and a man got
killed there. But nobody listens when we are trying to tell the world that we
have civilian victims here.

The enemy is dropping "cassete bombs" which are forbiden by the international
law. I mean if anyone think clearly: we are a small country - how can be
possible that a country like that is trying to develope a world catastrophy?

That is someone's imagination. We are an old nation like any other in Europe,
we were fighting for Kosovo in 1389 - years before Columbus made mistake and
discovered America.

Sorry I Wrote so much about these things,but I'm angry of media in the world
who are trying so hard to satanize my nation who is guilty only because its
territory is the crosroad of the world roads and interests.

If I find some more time to write you I shall write I promise!

Your Goga.





다시 편지를 쓰겠다던 그녀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2년이 흘러 지구 정반대의 장소에서 또다른 비극이 벌어졌다. 그때의 가해자
는 피해자로 둔갑해 있고 나는 우리 국민들의 희생과 죄없는 민간인의 희생에 또 슬픔
을 느낀다.

그리고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옳고 그름을 정확히 구분해
낼 잣대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나에겐 세르비안 친구가 있었고 미국인 친구도 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이 나
의 친구이기에 나는 슬픔을 느낄게다.

그러나 미국이란 나라....그가 나의 친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반복되
는 비극에 겁에 질렸을 뿐이다.

이제 또 어떤 친구가 희생될 것인가?

Goga...그녀가 보고 싶다.
젤소미나 입니다.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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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220
2001.10.07 22:09
고가는, 약속할께! 하고 느낌표를 찍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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