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1300원. 천삼백원.

sadsong sadsong
2003년 03월 31일 04시 44분 14초 1184 3 1
<친구>

이른 아침에 분당 친구 사무실엘 갔습니다.
가구 옮기는 것 좀 도와주기로 했었거든요.

물론 일을 도와준 사례로 떡볶이를 제공받는다는 조건부 출장노동이었습니다.
그 분당 미금역 근처엔 -적어도 제 입맛엔- 최고! 라고 여겨지는 떡볶이 집이 있어요.

한시간 반정도 걸려서 분당가고,
이,삼십분 힘좀쓰고,
떡볶이 한사발 먹고, 다시 서울 오는거죠.  그렇게 삽니다.
서로의 관계에서 복잡한 계산이 필요없는, 그런 친구가 한놈은 있다는건 저의 행복인거죠.
(사실은 두놈.)

아무튼 일을 다하고 사무실 창밖으로 내려다본 그 떡볶이 집....
문을 닫았네요.  일요일이라서? 그건 모르겠어요.
....
그놈이 그 사실을 알고서도 저와 계약을 한거였다면....
....

바로옆 이마트에 인라인스케이트 헬멧을 사러 같이 가려고 하기도 한거였지만,
이마트 지하 떡볶이가 더 맛있다고 수작을 부려옵니다.
(그놈, 인라인스케이트 마라톤(?)에 참가한다는데, 헬멧이 없으면 아예 참가를 안시켜 준다네요.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을 느낍니다.)

헬멧 사고 지하로 가보니, 자[짜]장면, 돈까스, 이것 저것 다 파는데, 떡볶이는 안팝니다.
"여기서 먹어본건 맞냐?"
"그러니까.... 전에 분명히 먹었던거 같은데...."
허허.... 이걸 확.

서울쪽으로 더 오면 서현역이라고 있습니다. 거긴 삼성플라자가 있죠.
버스도 그쪽에서 타면 제가 서울 가기가 더 편하고 하니, 거기 지하에 가서 먹재요.
갔지요....
삼성플라자 지하에도 떡볶이집이 없군요....
허허.... 이것 참.

사실 오늘은 떡볶이보다 햄버거가 더 땡겼는데, 햄버거는 죽어도 싫다는 놈이라.

결국, 서현역 앞의 떡볶이골목에서 그저 보통의 떡볶이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서울의 홍대앞엘 가야했는데 직접 가거나 옥수동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가야 했어요.
그놈이 미안한지 서울까지 태워다 주겠다는걸, 그냥 버스타고 간다고 차문열고 확 내렸죠.




<버스>

광화문 가서 홍대를 가거나, 압구정에 가서 옥수동을 가는 두가지. 후자로 결정되었습니다.
광화문 가는 버스는 많이 오는데 압구정 가는 버스는 안와요.
한참 기다려서 탔습니다. 909번.
앞자리엔 이쁜이도 앉아있고, 헤드폰에선 강산에 '명태'가 흥겹고, 길도 안막혀요.  잘 달렸죠.

이제 역삼동입니다.  잠깐 정차한 사이에 기사 아저씨가 문을 열고 내리시네요.
잠시후 출발.
잠시후 정거장 근처에서 다시 정차. 또 내려갔다 올라와서는 이번엔 전화를 하십니다.
"저 누구누군데요. 지금 부동액도 새고, 뭐도 어떻고.... 여기요? 역삼동 어디쯤이요."

아하, 차가 고장난거로군요.
이런 젠장. 그냥 광화문 가는걸 탈껄. 한참을 기다려서 겨우 탓더니 고장이라네요.

제복 말끔히 차려입은 그 사십대 기사 아저씨는, 아마도
버스운전엔 초보이거나, 그 회사에 들어간지 오래되지 않았거나, 몹시 온순한 성격이거나,
뭐 그런것들 중 하나로 보였습니다. 회사측과 전화하는 태도가 그렇네요.

잠시 뒤 승객들한테 한말씀 하십니다.
"저.... 버스가 고장이 나서요.  이 버스가 다시 올래면 한참 기다리셔야 하니까...."

사람들 투덜대면서 내리죠. 앞자리 앉았던 이쁜이는 다시 제대로 보니 이쁜이가 아니군요.
그건 참 다행입니다.

그런데 저는,
몇십분을 기다린 버스인데다가, 그래서 약속시간도 늦을 것 같은데다가,
목적지에도 못가고 내려야 하는데다가, 생활이 궁핍하기로 유명한 냉혹한 백수인데다가,
아저씨가 차비에 대한 언급도 없으시니,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죠.

다른 사람들은 다들 근처의 버스 정거장으로 가고,
아저씨는 버스 뒤 엔진룸 뚜껑을 열고 열심히 관찰하고 계시고,
전 차비 내놓으라고 말할 참으로 헤드폰 목에걸고 아저씨에게 접근중이고,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한 여학생 두명이 제 뒤에서 머뭇거립니다.

"아저씨, 차비를 돌려주셔야 되는거 아닌가요?"
"(당황하십니다) 네?  아니.... 그.... 그건.... 내가 결정할게 아니고...."
"아니 전 압구정동까지 가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차비를 다시 주셔야...."

이시점에서 아저씨는, 버스 뒤 열어놓은 엔진룸을 떠나 버스의 좌측에 있는
(그러니까 찻길로 보면 중앙선 방향으로 나있는) 기름 주입구처럼 생긴 작은 뚜껑을 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저씨가 그 뚜껑을 여는 순간!
"치이익∼∼∼!"
하는 강한 소음과 함께
초록색 액체(후에 부동액으로 확인된)와 수증기가 맹렬히 뿜어져 나옵니다.
"치이이이익∼∼!"

"악!"
아저씬 순간 얼굴을 가리면서 옆으로 피했구요.

마침 옆의 차들도 신호대기 중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강남대로 6차선에 정차되어있던 버스 좌측에서 뿜어져 나온 초록물이
포물선을 그리며 5차선, 4차선, 3차선까지의 차량들 위에 소나기처럼 뿌려지는 상황.
액체와 수증기, 많이도 뿜어지더군요. 최소한 10초는 더 됐을걸요.  
멍하니 쳐다보던 제가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서 찍을래다 말래다 다시 찍을래다 말고
집어넣을때까지 계속 됐으니까요.

제 왼다리와 양쪽 구두에도 약간 튀었네요.
날벼락 맞은 차들은 왠일인지 그냥 말없이 가더군요.

주변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죠.
아저씨의 하얀 제복셔츠 왼 어깨와 왼 팔이 많이 젖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돈 얘길 이어갈 순 없잖아요.
"괜찮으세요?"
"@#%$$%#"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아저씨, 다시 전화합니다.
"저 누군데요. 지금 차가 어떻게 됐고,  #@$$%#@#%  손님들이 차비를 달라고 하는데요....
세분이요. #%#$%@#$  네...."
이 상황에서도 참 말투가 선하십니다.

여학생들도 한마디 합니다.
"저희 버스 오래 기다려서 탔는데...."

아저씨, 운전석으로 올라가시는군요.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그 두 여학생은 앞문 밖에서 올라간 아저씨를 올려보고 서있고.
전 따라 올라갔습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휴지라도 좀 드릴까요?"
아저씨가 걷어올린 팔뚝을 보여주는데 한쪽 면이 빨개졌어요. 조금 부은것도 같고.
"지금 휴지가 아니라.... 어디 빨리 찬물을 좀 대야될거 같은데...."
전 그때서야 수증기와 함께 뿜어져 나온 그 액체가 '당연히' 뜨거운 것이었을거라는걸 깨달은거예요. 그때서야.

아저씨의 얼굴도 좀 붉그스름 한 것 같습니다.
"얼굴은 괜찮으세요?"
놀래서 거울을 보시더니,
"얼굴은 괜찮아요"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병원에 가셔야 할거 같은데요...."
"아이 참, 그러니까 내가 지금 차비고 뭐고 정신이 없는데...."
"...."

하지만, 잠깐 셈을 하십니다.
"세명이니까, 삼천구백원이면 돼죠?"
"네"(이건 어느새 버스계단에 올라서있던 여학생의 대답입니다.)

동전버튼을 누르기 시작하시는데, 정신이 없으신 것 같아요.
당황하면서 누르시면 여학생 한명이 동전을 세는 그런 상황입니다.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병원에 가셔야 될텐데...."
"몇개 나왔어요? 이제 다 나왔나?"
이제 동전 서른아홉개가 다 나왔나봅니다.
여학생, 맞다는 싸인을 아저씨께 보내고,
아픈 팔에 얼굴 일그러진 아저씨와 뭐라 할말을 잊은 전 버스를 내려오죠.
동전 받아든 여학생이 제 몫의 백원짜리 열세개를 제게 내밀었구요. "맞죠?"라면서.

여학생들 가고, 전 동전 받아들고 멀뚱히 섰고, 아저씬 팔을 적실 물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다행히 바로 옆에 공사장이 있네요.
그곳으로 급히 들어가신 아저씨, 잠시뒤에 나오시는데,
표정으로 보건데, 다행히 데인 왼팔에 물을 적신 듯 하던데요.

약간 마음이 놓여 저도 버스 정류장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백원짜리 열세개를 뒷주머니에 넣으니, 헐렁한 바지가 더더욱 축 쳐지는 듯 한 느낌이었어요.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압구정행을 포기하고 버스로 시청, 지하철로 홍대엘 갔습니다.
소월길을 거쳐 시청을 가는데, 하늘은 맑고, 남산을 찾은 이들이 눈에 많이 들어오네요.




<1300원.  천삼백원.>

밤 늦게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볼일을 보는동안
뒷주머니 한웅큼의 동전들이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축 늘어진 주머니,
걸을 때 철렁철렁 소리,
앉을 땐 엉덩이에 깔리고,
불편했어요. 하루종일.

그런데....
사람들과 거의 헤어질 때쯤이죠.
아까 낮의 그 아저씨가 갑자기 다시 떠오르면서
이제, 뒷주머니의 동전들은 그 늘어짐이, 그 불편함이, 느낌의 종류가 달라진거예요.
아주 어둡게 불편해진거야. 젠장.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그 아저씨는 정말 선한 인상과 말투를 가졌었거든요.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더 크게 위험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거든요.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정말 걱정이 돼서 따라 올라갔었거든요.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뭐, 그렇게 많이 다치거나 한 것 같진 않아요. 다행히도.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지금 동전들을 꺼내서 쌓아놨는데.... 이것들을 어쩌지.... 열세개.

....

저는 왜 생각을 바꾸지 못했을까요.


sadsong / 4444 / ㅈㅎㄷㅈ
============================================================
너무 자신있게 말하지 말아요.  나중에 슬퍼지면 어떻게 하려고....
============================================================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hyulran
2003.04.01 13:20
간만에 느껴보는 아름다운 백수이십니다.
Profile
jelsomina
2003.04.01 14:24
앞으로 계속 백수인 척 ~ 하면 혼난다 ~
cinemyth
2003.04.03 15:40
다음번엔 생각을 바꾸시면 되죠~
이전
27 / 69
다음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