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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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나무심기.

jelsomina jelsomina
2003년 04월 11일 03시 51분 40초 1187 4 1
나무를 심고 싶어졌습니다.
나무를 심을만한 장소가 얼마후에 생길것 같아서 나무심는 일을 좀 알아봤습니다.
차를 타고 늘 다니는 길에 재개발 아파트 지역이 있는데
그 단지안에 나무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벚나무들이 .. 아주 잘생긴 나무들이 수천그루도 더 됩니다.

구청으로 재건축 조합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봐도
나무를 올겨심는 일에 대해선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후배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일인 피켓 시위라도 하고 싶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며칠전에 나무 옮겨심고 싶은 욕심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그 큰나무들을 뭐하러 옮겨심냐고 하시면서
작은 묘목들을 사다가 심어도 벚나무는 금방 자란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있으면 그늘도 지고 꽃도 많이 피냐고 여쭈어봤더니 .. 십수년 자라면 아주 많이 큰다고 하십니다.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그걸 심어놓고 자라길 기다리냐고.
큰 나무들을 사서 옮겨심고 싶다고 말했지만 ..
어머닌 무어라 대답이 별로 없으십니다.

잠시후 왜 그렇게 급하게 서두르냐.. 나무는 어릴때부터 가지를 잘 쳐줘야 이쁘게 자란다고
그리고 큰 나무를 옮겨심으면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십니다.

이미 큰 나무들을 사다 옮겨심고 그 혜택을 빨리 누리고 싶은 난 그런말에 쉽게 대답을 할수 없었습니다.

내일 세상이 망해도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말은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책속에나 나오는 얘기라고 아직은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매연 마셔대며 만원버스 시달리듯 그렇게 봄을 맞이하는게 싫어서
가진거 다 털어서라도 난 혼자 편하게 신선놀음 하고 싶어서 ..
꿈을 꾸어봅니다.
잘 자란 나무로 3그루 정도 사서 옮겨심고..
봄이면 꽃피고, 여름이면 그늘밑에서 영화처럼 나무가지에 침대를 만들어 걸어놓고 낮잠을 즐기고
가을에는 낙엽을 긁어모아 연기를 피우고 .. 그런 생활을 하고 싶어서
잠깐 헛꿈을 꾼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은 그런 급한 마음들로 가득한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작은 묘목을 심으면 중년이 넘어서야 아마 그런 생활을 할수 있겠지요
그래서 요즘은 어린 나무를 심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에게 질투가 납니다.

꽃이 이쁘다고 했더니 벌써 늙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봄놀이는 나이들어 가고 싶다고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들에 나가보고 싶고 숲길을 걷고 싶고
봄에는 벚꽃밑에서 술도 한잔 하고 싶어집니다.

몇년 되지 않는 작은 묘목들을 마당에 심는일이 자꾸 헛된일로 생각됩니다.
빨리 누리고 싶은 마음을 버릴수가 없습니다.

아버님 산소에 심어놓은 감나무가 이젠 제 키보다 조금 더 자랐습니다.
감도 제법 열립니다. 해마다 감을 따러 가는데 지난해에도 갔더니 누군가 다 따가고 난 후 였습니다.
그런데도 별로 약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것인지 모릅니다.

이미 다 자란 나무들을 심을 마음이 사라져 묘목 몇그루 심어놓고 뿌듯해 할지..
아님 이거 언제 크나 싶어서 헛웃음을 짓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겠지요.

내 마음이 자라는 만큼 나무의 크기는 작아질것도 같습니다.
젤소미나 입니다.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vincent
2003.04.11 13:16
나무가 자라 볕을 피해 서 있을 만큼 그늘도 드리우고,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넉넉하게 품어안을 만큼 든든하게 가지를 뻗어나갈 즈음,
그늘도 꽃도, 지금보다 더 시원하고 예쁘고, 그렇게 보일 때까지,
그 때까지 사는 것도 괜찮겠네,
작은 묘목 몇 그루에 그런 소소한 소망을 품어보는 것도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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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song
2003.04.11 17:22
그의 생일은 식목일입니다.
어린날, 그의 생일에 심어진 묘목에는 'XX이의 O번째 생일을 기념하며'라는 부모님 친필 이름표도 붙어있어요.
물주기, 비료주기, 사랑주기, 모두 그의 몫이었죠.
매년 생일마다 나무 옆 같은 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습니다. 누가 더 빨리 자라나.

시간이 참 빠릅니다.
수십년 세월을 이겨내고 굵은 뿌리와 가지들을 거느리게 된 그 나무는, 이제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수십년 세월에 지쳐버린, 남겨진것 하나 없이 병든 그는, 이제 마지막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또 한번의 봄이 오는 4월, 그의 육십몇번째 생일.
교복입고 찍은 사진, 군복입고 찍은 사진, 정장입고 찍은 사진,
웃으면서 찍은사진, 담담하게 찍은사진,
부모님과 찍은 사진, 애인과 찍은 사진, 친구와 찍은 사진....
나무곁에 앉아 그 수많은 사진들을 한장씩 넘겨가며 돌이켜 보니
사랑이 떠났을때에도, 친구들이 등을 돌렸을때에도, 선물주신 부모님이 가셨을때에도, 그 나무는 언제나 그자리에 가만히 있어주었어요.

부모님이 달아주셨던 이름표의 싸인펜 글씨는 거의 희미해져 잘 알아볼 수도 없네요.
이번 생일엔 처음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갑자기 내리는 4월의 봄비가 사진들 위에 툭툭 떨어지기 시작할 때,
이젠 더 이상 그가 돌보아 주지 않아도 될 그 나무에,
가벼운 마음으로, 한가닥 줄을 드리워 몸을 맡깁니다.
몸이 너무 말라버려 나무가 힘들어 하지도 않을테지요.
아니, 조금 힘들어도 참아줄거예요.


삶이 지옥만 같았던 그의 마지막 얼굴에, 이제야 겨우 희미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죄송합니다.
두분 건강한 글들을 읽곤, 겨우 이런 생각이나 떠올리고.... 아니, 떠오르고.
비가와서 그래요.... 할일은 안하고....
vincent
2003.04.12 19:10
난 왜...
유독 튼튼해 보이는 걸로 고르고 골랐을 그 가지가
거짓말처럼 하필 그 순간 우지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러질 것 같을까요...
어이없게 바닥에 툭 떨어진 초로의 남자가
아픈 허리를 받치고 서서 나무를 올려보다가
그냥 픽 웃고 말 것 같을까요...
자기 때문에 부러진 큰 가지,
미안한 마음에 집으로 힘겹게 끌고 갈 것 같을까요...
그 가지 하나 끌고 가는게 힘들어
죽으려던 마음 까맣게 잊고,
낑낑... 얼굴도 벌개져서는... ^^;;;
jasujung
2003.04.12 21:03
난 식목일 전날, 이쁜 화분을 만들어 해바라기며, 봉숭아를 심어 아이들에게 나눠줬답니다. 꼬박꼬박 두 숟갈씩 물을 주렴..그러면서,,그 씨가 벌써 싹을 틔웠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지요..아이들이 금방금방 자라듯이, 난 아직 아긴데,,,어느 새 이만큼 자라버렸듯이 나무도 금방 자란답니다...키우는 사람이 잊어버리는 순간이 더 많은데도 화내지 않고 나무는 새근새근 잘 자라지요..갑자기! 나도 나무를 키우고 싶어졌다...근데 늘 사랑할 자신이 없어...안키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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