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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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올나이트

pearljam75 pearljam75
2004년 12월 26일 02시 47분 43초 1327 30
나는 지금 삼성동에 있는 모호텔 21층 레지던스 룸에서 올나이트 중이다.

야경은 아름답지만 크리스마스 파티 겸 송별회 치고는 기분이 업되지가 않는다.
불참 멤버들 때문에 썰렁하기도 하고.
빌려온 DVD도 다 보고 케이블 채널이나 이리저리 돌리다가

새벽 2시도 되지 않은 지금... 주변은 골아떨어지는 분위기고 나는 노트북앞에 앉았다.



아침엔 3년만에 교회에 성탄예배를 보러갔다.
<조폭마누라> 결혼식 촬영장소로 영화에 나왔던 그 교회다.
오늘은 내가 어린 조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갔다가 와야 했다.

십여년전, 아기같은 새하얀 피부에 찰랑찰랑한 생머리,
부드러운 미소와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자랑하던 미남 주일학교 선생님은
배 나온 부목사님이 되어 예배당을 지키고 계셨고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나의 손을 붙잡고 근황을 물었다.
누가 근황 물어보는 게 요즘 제일 겁난다. 으흐흐흐흐...

지금 생각해보면 의심없는, 맹목적인 신앙은 마약처럼 오랫동안 나를 지켜 주었던 같다.
저 밑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도 나는 불안하거나 괴롭지 않았다.

무위적인 Let it be- 아직 때가 아니다, 사상도 날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하나님은 날 사랑하셔!"라는 자위적인 세뇌는
가구 모서리에 아이가 찧이지 않게 하기 위해 고안된 안전장치처럼
정말로 하나님이 날 벼랑끝에서는 밀어버리지 않을거라는 어처구니 없는 안도감을 주었다.

물론 배타적인 기독교를 남에게 귀찮게 전파할 생각은 없고,
더군다나 생판 모르는 남이 귀찮게 내 시간을 방해하는 걸 참지 못하는 나는
지하철이나 도서관에서 '복음을 전하는 중'이라며
말을 걸어오는 두꺼운 얼굴과 두터운 신앙심을 지닌 신도들을 혐오한다.

왜 먹히지도 않는 전도활동을 하는거야?
효율적인 걸로 좀 찾아보지, 왜 모르는 사람의 시간을 뺏고 귀찮게 하는걸까?
자원봉사나 몰래 열심히 하는게 하나님 보기에 좋은게 아닐까, 혼자 제멋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마약이 습관이 되면 인간을 파괴하듯
종교도 습관이 되니 약빨이 떨어져 자기 혐오와 무신론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머리 쥐나게 그런 관념적인 것들 뭘 그리 고민하나,
귀찮기도 했는지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나. 잘 기억도 안 난다.


1년 장기투숙 비용이 5천만원 정도 하는 이 레지던스 룸은 주로 외국계 회사의 임원들의
주거공간으로 사용된다고 하는데
외국인 회사에 다니는 친구의 사장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아 본국으로 돌아간 사이
며칠 자신의 방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차피 매일 호텔 청소부가 청소와 설거지를 해주는 공간이니
친한 회사 직원이 친구들을 불러와 하루밤 논다고
방 주인이 결벽증 환자마냥 지랄지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와인잔, 샴페인잔, 맥주잔, 물컵, 커피잔, 머그 등 각종 컵들과
디쉬별로 구별된 스푼과 포크, 나이프등 입이 떡 벌어지게 모든 게 갖추어져있는 주방을 보고
어찌나 즐겁던지 집에서 준비해 온 재료로 소주에 떠먹을 수 있는 국물 안주를 금새 만들었지만
다 먹지는 못했다.

녹차에 밥 반공기 말아 김치 한 조각씩 집어 먹으면 땡인 요즘 식습관과는 대조적으로
호텔방에서 럭셔리하게 놀아보자는 의도에 맞게 각종 안주와 술을 준비했지만
위가 작아져서 그런지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라면 하나를 끓이면 다 먹지못하고 반은 버리게 된 것도 꽤 된 것 같다.
술도 예전처럼 퍼 마시지 못한다. 옛날의 내가 아니다.
...........................

사실 영화판에서 연봉이 5천이 되는 사람은 몇 없다.
화끈하게 뜨지 않는다면 어렵다.
이 판에서 오래 버티는게 장땡이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므로
우리는 임권택 감독을 존경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연봉도 아니고 전세금도 아니고 주거비용으로만 1년에 5천만원을 지불해야하는
-물론 회사에서 대주는 거지만- 그런 곳에 와보니 즐겁게 웃고 떠들며 퍼 마실 수만은 없다.

하나님,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옵나이까.

열등감은 아니지만,
금융회계나 법무, 경영을 선택하지 않고
서른이 넘어서도 이화주막 같은 델 가서 메뉴판을 보고 술값고민하고 술을 마셔야하는
영화인의 길을 선택했으니
내가 책임져야 할 인생이지만
낭패감과 회의스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다.

하지만
이 룸의 주인이 여자의, 유색인종의 몸으로 다국적 기업 한 지사의 경영인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간과해서는 안된다.

탁상공론, 격한 술자리, 아침형 인간과는 상관없는 게으름, 수동적 자세, 네탓이오 버릇...

2005년에는 청산할 것이다.

의지가 박약이라면 다시 종교라는 약빨이라도 세워서....

... 하나님은 날 사랑하셔! 세뇌도 하지만
사실 절에 가서 점심공양 먹고 열심히 법당에서 기도도 잘 한다.
부처님은 Let it be 하라고 하는 것 같고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면 부를 쌓을 수 있게 해주신다고 하는 것 같아
헷갈린다. 칼뱅이 문제였던가?

올나이트는 무슨 올나이트, 다 취침 모드다. 나도 자야겠다.

남은 술은 내일 아침에 마시도록 하자.

Merry Christmas, next morning

Don't look back in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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