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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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유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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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4월 26일 21시 16분 13초 2774 6 65
<한겨례21> 343호 : '10명의 각계인사가 미리 쓴 나의 유언장'

사랑하고 기뻐하라!
-유년에서 노년까지 세대별로 전하고 싶은 말

김창완/ 가수



열살이 안 된 어린이들아!

이제 나무 이름과 새 이름, 풀·꽃 이름 그리고 엄마, 아빠의 이름을 외울 나이의 어린이들은 이 세상을 이렇게 봐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너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병아리’, ‘개나리’, ‘빵빵’, ‘엄마’, ‘아야’, ‘피자’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알아야 한다. 만약에 네가 네살이라면 내 자전거보다도 어리고 그때 산 자전거 신발보다도 늦게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네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너도 이름을 얻기 전부터 이 세상에 있었던 것처럼 이름을 얻기 전의 나무와 이름을 얻기 전의 하늘, 이름을 얻기 전의 어둠과 밝음을 보아야 한다. 달팽이가 부르는 노래는 제목이 없다. 되도록 그런 노래를 불러라.

이제 스무살이 안 된 청소년들.

아! 그 주체할 수 없는 성을 어떻게 할까? 그래. 너희들은 죄인이다. 너희들은 지금 욕망에 대하여 배우고 있다. 그 청춘의 불로 태우지 못할 것이 없다. 용광로 같은 심장은 무쇠라도 녹인다.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너는 더 격리될 것이다. 너에게 세상은 미세한 균열도 허용되지 않는 격납고다. 하나 그 속에서 너의 불꽃이 꺼져서는 안 된다. 오! 귀한 세상의 빛, 청춘의 불꽃이여! 그 광휘에 눈이 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들은 나르시스다. 고요한 물가나 거울을 멀리하라. 당신을 유혹하는 것은 당신 자신들이다. 스물몇, 당신들은 이제 사물에 이름을 붙일 만큼 지혜롭다. 그리고 당신들은 남들로부터 ‘님’이나 ‘씨’라는 호칭으로 불릴 것이다. 아직 서른이 안 된 당신들은 이율배반의 극치다. 모든 규율을 어기며 모든 규율 안에 산다. 당신들은 개울의 소용돌이다. 돌 틈에서 기회를 엿보다 특이점이 생기면 과감히 몸을 던진다. 유혹이 당신들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당신들은 언제나 탈옥을 꿈꾸는 수인이다. 아! 아이러니여. 당신들의 위장술은 어쩌면 가장 교묘한 신의 화장술인지도 모른다.

서른 즈음 당신들은 세상에 아주 익숙하다.

이제 후각으로 날씨를 안다. 눈오는 냄새, 비오는 냄새, 기다림과 이별과 사랑의 냄새를 안다. 모든 인연의 중심에서 균사같이 인연이 또 피어난다. 아이가 입학할 때 당신은 느낄 것이다. 당신이 부모와 너무 닮았다는 것과 아이가 당신을 따라 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인 또는 답답함. 세상에 익숙해지지만 못 가본 세상은 오히려 더 넓어진다. 킬리만자로는 더 멀어지고 파푸아뉴기니는 이제 자신의 지도에서 지워버린다. 수첩에는 필요없는 전화번호가 쌓여간다. 단 세개의 전화번호만 남기고 모두 지워라.

마흔 대 여섯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가장 교활하다. 대부분의 우화에서의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처음으로 허물을 벗고 싶다고 생각한다. 몇몇은 허물을 벗고 우화하기도 한다. 그들의 우화는 나비의 그것처럼 화려하고 장엄하지 않다. 그들의 우화는 고작 이혼이다. 그들이 갑자기 캐주얼을 입고 싶어하는 것은 아직 변태의 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쉰은 유치원생이다.

이들은 다시 정장을 하고 주말을 기다린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새로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것은 없다. 당신이 처음 입은 양복이 체크무늬 양복이었다면 체크무늬 양복을, 처음 입은 한복이 감잎 물들인 색이면 그 빛의 한복을 다시 입으리라. 그들은 인생을 새로 쓰고 싶어한다. 하지만 종이는 바랬고 잉크의 색은 묽다.

예순, 비로소 차 맛을 즐긴다.

일흔살의 당신은 전화 벨소리만 듣고도 누구의 전화인지 안다.

여든살의 당신은 체온이 34.5도라고 느낀다. 가끔 가랑잎을 주우며 그게 더 따뜻하다고 느낀다. 이제 당신은 보이는 것보다 만져지는 것을 더 믿는다. 그래서 손주의 살을 만지길 좋아한다. 그들은 질색을 하지만….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사랑하라. 그리고 기뻐하라. 삶은 고달프지만 아직 더 먹을 나이가 있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비록 임종일지라도….



*저작권법 저촉 소지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73lang
2005.04.26 22:55
나의 유언장

이 세상에 하늘의 별만큼
여자는 많지만
아무도 가슴 한 번
보여 주지 않더라.

[아즈마 산시로 시집]에서


우겔겔
vincent
2005.04.27 00:32
아휴, 멋진 아저씨같으니라구.
어딘가로 퍼가요.
출처는 밝힐게요.

괜찮을까요 안괜찮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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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rljam75
2005.04.27 00:49
김창완 아저씨...

대한민국에서 가장 지혜롭고, 멋지고, 사랑스러운 남자.

지난 주 <떨리는 가슴> 보다가 좋아서 환장할 뻔 했지요.

동그란 안경, 어색한 부분 가발(?), 기타를 치는 손가락들, 예쁜 노래 목소리,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뜨거운 가슴.


김창완의 골든 디스크에 고백을 했더니
진공청소기와 헤어드라이어를 상품으로 준 적이 있었드랬지요.

안주셔도 계속 좋아할건데 말입니다.

난 정말 눈이 너무 높아요.
shally
2005.04.27 01:34
서른 즈음 당신들은 세상에 아주 익숙하다.

진짜 익숙하던가요...??당신은...
익숙해려고 발버둥 치긴 하는데....

또 금세 권태로워 질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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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hemes
2005.04.27 17:52
난 지난주 떨리는 가슴 보고 울어버렸네.. 너무 멋쟁이 아저씨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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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somina
2005.04.28 02:14
요한복음 13장.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리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것처럼 너희도 서로를 사랑하라."

위의 글, 거의 계명 수준 같아요. 특히 아이들에게 남긴 이야기.
김창완 아저씨를 보면 기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푸른 숲을 보고 고마움을 느끼는 그런 종류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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