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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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웰컴 투 더 무비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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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7월 16일 16시 14분 45초 1825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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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아래는 촬영감독 스벤 닉비스트 Sven Nykvist 의 인터뷰로,
97년 발행된 'In Reverence of Light' 의 'Tarkovskij to Woody Allen' 챕터
'On the Shooting of The Sacrifice' 대목을 옮긴 것입니다.

1922년 스웨덴 태생인 그는 잉그마르 베르히만과 타르코프스키, 우디 앨런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데요
알고보면 필립 카우프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노라 에프런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
라쎄 할스트롬 <길버트 그레이프> 등의 촬영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원문을 구수하고 재치있게 우리말로 옮긴 김현석씨는
영화학교 촬영전공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다수의 장편영화에서 촬영/조명부로 일했습니다.



<희생>을 촬영하며


내 개인적인 모토 중 하나가 바로 세상에 '너무 늦었다'라는 건 없다는 거야. 많이들 60줄
넘어가면 자기들 인생이 막바지에 와있다고 생각하지. 공식적인 은퇴날짜가 다가오는거야.
그래, 고마웠어, 안녕들 하라구.

하지만 우리 같이 인디펜던트하고 프리랜서 같은 치들은 때론 그런 생각에 동의안해.
확실히 창조성이라는 건 특정 나이에 딱 멈추는게 아니야. 많은 아티스트들, 작곡가 작가들
그리고 영화쟁이들이 아직 80대가 되어도 액티브해. 배우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사실 그동안 난 정말 흥분되고 재미있는 역할들을 도맡아 왔고 최고의 영화들을 좀 했지.
이런 은퇴시기가 바짝 다가온 나이에서도 말이야.
1985년에 시작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랑<희생>이 있었고, 필립 카우프만이 밀란 쿤데라 소설
각본으로 만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했고, 우디 앨런과의 작업 몇 개가 있었어.

성화 화공인 안드레이 류블레프에 대한 그의 프레스코를 본 이후로 난 타르코프스키
(1932~1986)한테 완전히 무릎 꿇었었어. 그건 진짜로 내가 그걸 처음 봤을때 어떤 계시
같은 걸로 다가왔다구. 순수한 이미지들만의 마술이라! 소련에서 추방되서 그는 이탈리아에서
얼랜드 요셉슨을 주연으로 1983년에 <노스텔지아>을 찍고 스웨덴에 왔지. 둘은 좋은 친구가 되었어.

스웨덴 영화협회의 애나-레나 위봄은 얼랜드의 죽마고우 중 하나였어. 84년 깐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차기작을 스웨덴에서 찍을 수 있도록 초청받았는데 몇개 고르던 후보작들이
좀 있었지. 그리고 결국엔 얼랜드 요셉슨을 위해 쓴 <희생>을 초이스했어.

내 친구인 얼랜드는 타르코프스키가 잉그마르 베르히만을 존경하는걸 보고는 나한테 내가
카메라맨이 되면 어떻겠냐고 물어왔지. 그건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어. 사실 그땐 시드니 폴
락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제안받았던 타이밍이었다구. 얼랜드랑 난 우리 캐라를 영화에다
다시 때려박고 상호 투자를 통한 공동 프로듀서가 되었어. 정말 비지니스 안 되는 일이긴 했지.
하지만 경험이란건 때론 돈보다 가치있을 때도 있는거야.
어쨌건 난 그 영화로 깐느에서 예술공헌상을 받았어.

사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랑 안드레이는 참으로 잘 어울렸지. 우린 서로의 영화를
보기 시작했어. 그가 베르히만한테 느끼던 특별함과, 그의 영화에 대한 내 느낌들이 우리로
하여금 서로 명백하게 차이가 있던 몇가지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만들었지. 난 확실
히 그가 라이팅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그한테는, 주된 관심은 주
로 컴포지션이라고 하는 구성적인 것들에, 카메라 무브먼트들, 말 그대로 무빙 이미지들에
관한 것들이었다니까.

심지어는 배우한테도 관심이 없었어. 그는 언어소통 문제를 결부시켜서 자신의 소심함을 탓
하곤 했지. 그한테 가장 중요한 건 특별한 룩을 가진 특정 타입의 사람들을 고르는 것과,
개네들이 감정을 표현해내는 정확한 방식들이 있는지 지켜보는 일이었어. 타르코프스키 영
화에는 클로즈업이 절대 드물어. 아예 멀리서 배우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걸 좋아하는
편이었지. 거의 안무에 가까울 정도로. 항상 프레임 가운데는 피해 다니면서 말이야.

이런 문제들이 촬영 초반 몇 주를 몸살나게 만들었어. 잉그마르 경우와는 반대로 타르코프
스키는 로케이션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어. 거기에 도착해서 카메라 앞에 앉아서 동
선 좀 짤때까지 말이야. 이러기 시작하면 날 새는 거지 뭐.

이건 약과야. 타르코프스키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마음을 잡았을때만, 비로소 난 거기 기어
들어가 라이팅을 만질 수 있었어. 손쉽게 찍을 수 있는 샷보다 쭉 깔아논 트랙킹샷이 더 많
았더라면 말이지, 아마 시간 엄청나게 걸렸을거야. 영화할려면 그저 눈으로 보기에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외부 광선상태에 대해 굉장히 세심해져야 해. 노파심인데, 카메라 조수라면
그럼으로 발생하는 이미지의 선명도나 콘트라스트 변화들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들을 익혀놔
야 한다구.

하지만 이미지라는게 결국에 기록되려면 필름이 카메라 안에서 빛에 노출되는 상당량의 시
간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라구. 이런건 어떻게 일하는가 하는 작업방식의 차이들이고 그 방
법이 다른 것보다 좋았거나 혹은 더 낳았을거란 사실은 그 작업의 결과가 증명하지.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작업을 해. 찍새야 뭐 양보하는 수 밖에 없지. 그리고 이
런걸 판단하는 것은 감독의 지혜에 달려있어 - 진정으로 자기가 뭘 원하는지 자기가 알고
있다면.

타르코프스키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았어. 자기가 부르짖길, 한 10년 동안 그토록 오랫동
안 애타게 꿈꿔왔던 씬 하나가 있다는 거야. 그건 <희생>의 마지막 씬이 될 거였어. 메인
캐릭터의 집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싸그리 불타 없어지고, 완전히 돌아버려서 앰뷸런스에
실려가는거야. 전체 씬이 한 테이크로, 카메라가 한 백미터 긴 레일을 따라가는 동안 찍을
수 있게 계획되었지. 우리한텐 영국에서 데려온 특효팀이 있었고 더도말고 8분 10초만에
집이 완전히 불타없어져야 한다는 임무를 주었지. 안그러면 필름 매거진이 롤아웃되어 버리
는데 어쩌겠어.

한주 전체를 이 씬을 위해 칼같이 리허설했어. 우린 일광이 내리쬐는 컨디션에서는 찍지 말
자고 결론지었어. 그래서 이른 새벽 2시에 빠닥빠닥 일어나야만 했지. 후우.. 몇번의 테스트
가 있고나서 정확히 일출 전 세심하게 고른 바로 그 시간대에 첫 슛을 긁어댔어.

아마도 반 테이크 정도 지났을까, 내 조수새끼 하나가 소리지르는 거야,
"스벤- 카메라 스피드가 떨어져요! 지금 20프레임... 아 씨발 지금 16프레임이에요! 어떻게 해요?"

만약의 문제를 대비해서, 안전빵으로 난 추가 카메라 한대를 레일 가운데쯤에 깔아놨었어.
그래서 소리쳤어 "카메라 바꿔!!"

30초안에 걔가 카메라를 교체하고 우린 촬영을 계속했어. 타르코프스키는 우리가 카메라 바
꾼줄 모르고 있었지. 아마 거의 모두 다 그랬어. 모두들 불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곤
끝이 나고 앰뷸런스가 도착했을때 모두들 생각보다 잘나왔다는 생각에 꽤나 신나들 하고 있
었지.

그런다음 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했어. 타르코프스키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했지. 필름
은 이 모든 상황 아래 우리가 남아있는 것들로 뭘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로 현상소
로 실려갔어. 하지만, 뭐 방법이 없잖아. 어떻게 보더라도, 그건 타르코프스키가 수년간 그
토록 꿈에 그리던 시퀀스가 절대 아니었어 - 게다가 그건 영화의 클라이막스 시퀀스로 쓸
라고 했던 거라구.

우린 다시 집을 지을 돈도 두번째 테이크를 갈만한 돈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 줄토론이 이
어지고, 나랑 얼랜드는 공동 제작자란 역할로 다시 돌아왔고, 배우들도 다행히 좀더 계약을
연장하는데 동의했어. 우린 우리의 일본인 공동 프로듀서한데 추가 펀딩을 좀 받았어. 그리
고 모두가 결국엔 다시 찍기로 입을 모았지. 불가능이란 없어. 베르히만이 즐겨 했던 말이
야. 카메라 뒤편엔 역시 그의 스텝들이었지. 집은 다시 지어졌어!

어쨌건 난 안드레이한테 레일을 두개 까는 거에 대한 동의를 구했어. 안전을 위해, 약간 다
른 레벨로 두 대의 카메라를 마운트해서 동시에 촬영하는거지. 하루종일 우린 두 카메라를
동시에 돌려서 제대로 가고 있는지 리허설을 했어. 우린 모든게 적당하다 싶던 어느 아침에
그 씬을 찍었어. 근데 안드레이가 "카메라!"라고 소리치는 동시에 그만 해가 떠버린 거야.

타르코프스키는 소리질렀어 "우이 썅, 어떠케 해야 돼?"

난 말했어. "어이, 이봐. 자네가 할 수 있는거라곤 아무것도 없다네. 해는 기어나왔지,
집은 불탈 준비 다 됐지 - 게다가 저 집은 두번째 만든 집이라구..."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건 환상적인 결과로 나타났어. 집에서 무럭무럭 소용돌이 치던 연기가
태양을 가리고 땅바닥에 진짜 죽이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거야. 해가 뜬건 정말 럭키한 사고
였어 - 이런 걸 이용했고, 타르코프스키는 그 결과를 보고는 한없이 기뻐했었지.

하지만 그렇게 꼬장한 완벽주의자이긴 했어도, 그는 기꺼이 자기가 바뀔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어. 적어도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들한테는 말이야. 그건 실제로도 일어났다구. 때때로
그 소시적 러시아 영화학교에서 배웠다는 것들에서 벗어나 깜짝 놀랄 정도로 도약하곤 했다니까.

난 바라바스나 폴란스키와 이른 시기에 공동작업들을 겪으면서 이런 현상들에 대해 아주 빼
꼼해. 이들은 그 동유럽 영화학교라는 '가오'에 아주 질퍽하게 젖어있어서, 그래 뭐 세계에서
먹어주는 학교라 치자구, 웨스턴 동네에선 눈 딱감고 넘어가는 룰들보다 훨씬 더 빳빳하게
뿌리박힌 방식들을 고수하고 있었단 말야. 때론 그런 차이점들엔 순전히 현실적인 이유들도
있었어. 예를 들자면, 바라바스나 폴란스키는 현장에서 직접 카메라 쪽에서 칼라 밸런스를
맞추길 원했어, 나중에 현상소에서 맞추는게 아니고, 이게 더 쉽고 간단한데 말이지. 하지만
그땐 동구권의 현상소들이란 곳에서 붕어빵처럼 나오는 퀄리티의 스탠다드라는게 서쪽 동네
랑 비교하면 많이 짜친게 사실이었으니까 뭐. 하여튼 이런 경우엔 그들은 내 제안을 인정해
줬었지.

그치들은 트랙킹 샷이란 자고로 최대한 많이 쓰면 쓸수록 좋다라고 배운 것 같았어 - 난
이 셋들 아니었으면 그렇게 많은 샷들을 트랙킹으로 가진 않았을꺼야 - 참으로 부정할 수
없이 그 시네마틱한 가치를 담고있는 그 샷들을 말야. 근데 세상에 타르코프스키 경우엔 말
야, 그 막나간 학교가 이젠 사선으로 패닝하는 그런 현실적인 방법들까지 써서는 안된다고
가르친 것 같았어.

<희생>에서 찍었던 초반 몇 이미지들 중 하나가 그런 샷이 있었어. 우린 물컵 클로즈업에
서 가로질러 팬해서 저 멀리 앉아있는 얼랜드 요셉슨으로 올라가는걸 했어. 타르코프스키는
갑자기 오바하면서 책상을 따라 수평 트랙킹 한 다음에 얼랜드 얼굴까지 수직으로 올라가자
고 난리를 떠는거지 뭐야. 대안으로 몇 개의 테이크를 그렇게 보여준 다음에야 이게 더 나
은 어프로치였다는 걸 인정하더라구.

대체로, 타르코프스키의 비젼이란게 그가 때때로 의사소통에, 특히 언어장벽 같은 것들에
어려움을 겪긴 했어도 먹히긴 했어. 그건 그가 무엇보다 먼저 감정과, 무드와 분위기로 소
통하려 했기 때문이었지. 이미지에 의해서, 말이 아니라. 그는 사물과 자연에 소울을 불어넣
고 싶어했어. 이건 실제로 그가 베르히만이 했던 것들보다 더 멀리 나아간 거였어.

이런걸 깨닫으면서, 난 그와 일하는게 진정한 기쁨이 되었고 또 우린 아주 친한 친구가 되
는 걸로 끝이 났지. 그 또한 내 라이팅이 자기만의 그런 비젼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똑똑히
목격했다구. 기억하길, 다른 것들 다 집어치구고 말야, 우린 정말 영화 쫑나고 현상소에서
컬러 리덕션 작업을 하면서 정말 죽이 잘 맞았지. 잉그마르랑 내가 에서 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말야. 그 자신도 노스탤지어에서 같은 방법으로 했었지. 우린 어떤 씬은
거의 60퍼센트 정도 색을 뺐어. 카메라맨의 임무란게 빛 좀 지지고 카피 뜨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라네. 현상소에 있는 실력있는 암실쟁이들도 정말 귀중한 동료들이지. 필름 테크닉
의 닐스 밀랜더는 스웨덴에서 가졌던 내 작업에 진정한 서포트를 해주었어.

<희생>에 써먹은 컬러 리덕션이란 내 작업이 결국엔 내 큰 선생님들 중 하나인 구로자와
아키라를 만나는 영광을 가져다 줬어. 한때 그하고, 펠리니하고,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지네
들끼리 모여 같이 시대극 한판 찍자고 심각하게 계획했던 적이 있었지. 잉그마르랑 펠리니
는 로마에서 만났었고, 하지만 구로자와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고 결국 현실화되진 못했어.

<희생>이 극장에 걸리고 몇년 지나서 난 일본에서 커머셜 한 껀을 오퍼 받았어. 전엔 이런
일을 할 기회가 없었는데, 돈도 짭짤하더군, 게다가 혹시 구로자왈 만나서 안기게 될 기회
까지 노릴 수 있으니 말야. 그래서 덥석 그거 하겠다고 했지.

나란 인간이 불행스럽게도 그냥 다정스런 컨택 정도도 못할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타서 말
야, 작업은 다 끝나가고 2주나 지나갔는데도 구로자완 커녕 짐싸고 집에 가야되는 분위기였
어. 근데, 운이 좋았지. 그때 구로자와가 팔십이 다 되서 무슨 국가에서 주는 예술공헌상 비
스무리한 걸 수상하게 된거야. 큰 파티가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벌어졌어. 그 조직위는
내가 동네에 있다는 소식을 접수하고 진짜로 날 초대했지 뭐야.

<희생>은 말야, 자네들도 알다시피, 일본과의 공동 프러덕션이었고 영화도 도쿄에서 첫 상영
되었을때 많은 주목을 받았어. 내가 방문하기 바로 전에 말야. 구로자와도 영화를 봤었대 -
그리곤 "어이, 반가워" 하면서 날 만나고 싶어했다는거야! 그는 그 컬러 리덕션을 어떻게 해
냈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하더군.

우리가 서로 인사하고 소개하고 그러자마자 그는 날 독방에 끌고 들어가 둘이 앉아서 누구
의 방해도 받지 않은채 저녁을 먹으며 컬러 리덕션 프러덕션에 대해 한바탕 토론을 해댔지.
그런 이브닝을 누가 잊을 수 있겠어...

난 그가 왜 로마에 안 나타났는지 물었어.
"이봐, 난 너무 소심해." 그가 말했어.
"베르히만과 펠리니는 나한테 너무 형들이라구."

- 끝 -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isadhappy
2005.07.17 03:02
와 좋은 자료 정말 감사합니다.
wanie
2005.07.19 19:22
이거 일일이 다 친거냐.

아... 이런 속물적인 댓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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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2005.07.19 22:34
번역한 친구가 쓴 걸 나는 옮겨왔을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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