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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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야영소년 탈출기

sadsong sadsong
2005년 08월 13일 15시 05분 32초 1312 2 3
얼마전 비가 잔잔히 내리던 날 밤.

반가운 사람 만나 한강 둔치를 거닐고 있었는데
저 앞으로, 텐트를 주르르 펴놓고 야영 준비를 하고 있는 수십명의 아이들(초등학생들)이 보였습니다.
다행히 큰 천막이 쳐진 곳이라 비를 직접 맞고 있진 않았고.

이런 날 참 힘들겠다. 덥겠다. 끈적거리겠다. 우리라면 미쳐버리겠다. 등등의 생각을 잠깐만 해주며 지나쳤습니다.


얼마 뒤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 다시 그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 아이들 대부분은 잠을 자지 않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중 두 명의 아이(ㄱ,ㄴ)가 지도선생님들의 눈치를 부지런히 살피며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서는 살금살금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까.

도망나온 ㄱ : (굉장히 심각합니다) 저기요~
멈춰선 우리 : ?
도망나온 ㄱ : 저기.. 전화기 좀 빌려주세요..
멈춰선 우리 : 전화? 전화하게?
도망나온 ㄱ : (계속 뒤를 돌아보고 눈치를 살핍니다) 네.. 전화좀 쓸게요.
멈춰선 우리 : 왜?
도망나온 ㄱ : 아뇨.. 그냥.. 전화좀..

그 와중에도 ㄱ 과 ㄴ 은 우리들 뒤로 자신들의 작은 몸을 숨기려고 애를 씁니다.
좀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성숙한 성인들로서 아이들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되죠.
휴대전화를 빌려줬습니다. 그리고 물었죠.

sadsong : 너희들 지금 야영하는거야?
몸숨긴ㄱ : 네..
sadsong : 뭐, 어디서 하는건데?
몸숨긴ㄱ,ㄴ : ....
sadsong : 어떤 단첸데? 학교?
몸숨긴ㄱ : 아뇨.
sadsong : 그럼.. 교회?
몸숨긴ㄱ : 몰라요 뭐....
sadsong : (이런 썅. 여러번 질문하게 할래?..) 하하... 힘들겠다.. 전화는 어디다 하려고?
몸숨긴ㄱ : 얘네 엄마한테요. 탈출('도망'이라 그랬나?)할려구요.
sadsong : 어? (웃었다) 왜?
몸숨긴ㄱ :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먹을것도 안주구요.. 아침엔 딱 김밥 한줄만 주고.. 아까 점심엔 우유만 먹으라 그러고..
sadsong : 정말? (사실 또 웃었고) 그럼 확 경찰 불러야 되는데.. 야영을 언제부터 했는데..?
몸숨긴ㄱ : 그저께(7월31일 또는 8월1일)요.
sadsong : 언제까지 하는데?
몸숨긴ㄱ : 17일인가.. 뭐 독도까지 간다는데.. 에이.. (궁시렁궁시렁....)
sadsong : 와~ 그렇게 오래? (한번 더 웃었지) 그래서 엄마 불러서 탈출하려고?
몸숨긴ㄱ : 네..
sadsong : 야~ 독도 그거 좋은건데...

'독도가는것 = 왠지좋은것' 이라는 제 말은 무시당한 게 분명한 듯 보였고..
ㄱ은 ㄴ의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몸숨긴ㄱ : 아줌마 저 ㄱ 인데요.. 이거 정말 못하겠어요.. 아침엔 김밥 한줄 주구요.. 점심엔....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겨우 몇마디 주고받은 뒤 전화통화는 중단됩니다.
풀이 죽어버린 ㄱ. 아까부터 죽어있던 ㄴ.

sadsong : 안오신데?
몸숨긴ㄱ : 네....
sadsong : (자식아 당연하지, 이틀만에 엄살은..) 야.. 어떡하냐....

결국,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웃음을 건네는 우리를 뒤로하고
도살장 끌려가는 무엇마냥 슬금슬금 다시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아, 우리의 친절한 웃음은 ㄱ,ㄴ 에겐 잔인한 웃음으로 보였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재미있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이런건가 싶기도 하고.

결국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멋지지 않습니까.

여기 마음에 안들어, 썅 -> 탈출계획 공모 -> 멀리 지나는 행인 포착 -> 긴박한 '10여미터'의 탈출
-> 행인 붙잡아 전화 빌리기 -> 지원군(으로 믿었던 엄마)과 접선 -> 지원거절 -> 아무일 없었던 듯 조심스런 복귀....

엄마(또는 아줌마)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것만 빼면.

(참, 선두 지휘하던 ㄱ 에 반해 아무 말 없이 졸졸 따르기만 하던 ㄴ, 너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 좀 키워야겠다.
다른건 몰라도 너희 엄마한테 전화하는 것까지 ㄱ 이 해서야 되겠어?)


그리고 바로 다음날, 육영재단 국토순례 어린이들 기사가 터졌었습니다.
우연치곤 신기하기도 하고,
물론 같은 단체는 아니지만 비슷한 프로그램에 비슷하게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엔 재미있는 상황이란 생각에 내내 친절하게 웃어주긴 했었지만
어쩌면, 실제로 꽤 문제될만 한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쓰고 보니 좀 지난 이야기군요.


sadsong / 4444 / ㅈㅎㄷ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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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본거라고 생각하면 될텐데
나는 왜 아직 이 길에 서있나
<재회 - 박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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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kinoson
2005.08.13 20:59
우하하...
aesthesia
2005.08.14 10:18
잘못 본거라고 생각하면 될텐데 나는 왜 아직 이 길에 서있나
너무 공감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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