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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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Hee

ty6646
2008년 05월 29일 18시 33분 19초 1764 1
날이 선 칼로 베인 듯한 달빛 선연한 밤이 내려오면
한기가 돌면서도 한줌의 따뜻한 공기가 내 안에서 스며나온다.


1991년 그 가을에 학과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어느 시골역 앞에서 본 쏟아질 듯한 밤하늘의 별들,
월악산 어느 산기슭에 쳐놓은 텐트옆에서
저녁을 짓기위해 내려간 개울물에서 발견한 그 밝고 청명한 달빛,

1990년 오대산 어느 산중턱 개울가에 쳐놓은 텐트옆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빙 둘러앉아 노래하던 그 친구들,
덕유산 산아래 민박집에서 입으로 감자를 깨물어
저녁 찌개안에 넣던 친구녀석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

치악산 가파른 산중턱에서 땀방울 떨어지는 얼굴로 바라본
그녀의 눈에 담긴 내 모습



달빛 선연한 밤을 마주하면
오래전 묻혀버린 기억의 편린이 하나씩 순서없이 나타났다간 사라진다.
그래서 뭐.... 하는 마음으로 비벼서 조그맣게 뭉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말지만
잠시후면 그 쓰레기통을 뒤지는 내 모습이 거기 있다.
쭈글쭈글하게 구겨진 그것을 조심스럽게 펴보면 그때의 순수하던 내 모습과,
오늘 달빛만큼이나 청명하던 그대들의 모습이 보인다.






Hee...... 충청도로 밤길을 달려가던 통일호 열차는
어느 이름모를 작은 역에 멈춰섰고 우린 그 역에 내렸다.
오래된 형광등아래 희미하게 밝아있던
대합실 벤치 한 모퉁이에 앉아 쉬고 있는 그녀 옆에 몰래 다가가 앉았다.


'찰칵'


Hee.... 그녀 옆에서 그렇게 뻘쭘하게 앉아서 찍은 그 한장의 도둑사진은
그녀의 얼굴을 담은 유일한 사진으로 지금도 내 앨범속에 곱게 들어있다.
미칠 듯이 좋아한 것도 아니고, 까무러칠 듯이 사랑한 것도 아니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그런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라보는 관심이랄까.
그냥 그녀가 내 눈을 통해 내 마음안으로 들어왔고,
짧은 시간이지만 특별한 사람이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예감처럼 내 마음위에 얹혀졌다.
그때, 그녀와 난 장차 연인이 될 운명같은 것을 느꼈다면 지나친 것일까..... (^^)



지금도 미스터리다. 학과행사엔 늘 부정적이고 참가하지도 않던 그녀가
왜 그 한여름의 힘든 산행엔 그렇게 선뜻 동참했을까. 그것도 몇 명 모이지도 않은 MT에 말이다.


정말로 같이 갈거냐? 산이 무척 가팔라. 장난 아닌데… 괜찮겠어?
이러다가 당일날 못간다고 그러는거 아냐?


그녀에게 재삼재사의 확인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녀가 도중에 빠지면 낭패를 볼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스케쥴을 짜는데 확실하게 할 생각으로 그런 것도 아니다.
좋아서 그랬다. 몇 번이고 확인하고 싶고 몇 번이고 그녀를 통해서 듣고 싶었다.
함께 가는 길, 그것이 좋았다.


어쨌건 그렇게 따라온 그녀는 너무도 열심히 산을 올랐고
밝고 상큼한 미소를 온천지에 뿌리고 다녔다.
내려올땐 퍼져서 그녀의 짐을 다 들어줘야 했지만….(^^)




돌아보면 그녀가 있었다.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캠퍼스에서,
같은 시간대에 그녀와 난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그렇게 내가 군대가기까지의 2년이란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런데 돌아보면 난 한번도 그녀와 단둘이 커피한잔 마시지 못했고,
단둘이 캠퍼스를 걸어보지 못했다.


그녀와의 운명을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하늘이 일부러 맺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가만있어도 될 것이라고 여겼다.
내가 다른 여자를 생각할때에도, 내가 다른 시간과 공간에 있을때에도
그녀라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예감은 엉덩이에 붙은 꼬리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듣기 전 까지는….


제대하고 다음해,
그녀와 늘 함께 어울려 다니던 어느 여학우에게서 그녀의 결혼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리의 힘이 빠진다라고 할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운동화의 끈이 풀려버린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태만하게 있는 동안 그녀와 나 사이에 놓여져 있던 다리는
그렇게 아침이슬 사라지듯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나를 보는 것 같던 그녀의 눈가에 묻어있던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떠오른다.







개강을 하고 얼마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자료실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한무리의 여학생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그때 내가 마시고 있던 자판기 밀크커피를 본 여학생 하나가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와서는 커피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건다.


형 나 목말라 죽겠는데 이거 마셔도 돼?


그리고는 내가 마시던 자판기커피를 나꿔채서는 단번에 다 마셔버린다.
Hee는 같이 들어온 내가 어떻게 자기보다 한살 위라는 것을 알고 형이라고 부른 것일까?
아니 하필이면 왜 내 커피야. 목이 마르다면 옆에 있던 선배가 마시던 콜라나 마실 것이지……




그날 Hee가 깨끗이 비우고 내려놓은
그 빈 커피잔엔 어떤 마음이 가득히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녀도 나도 미처 보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던 어떤 마음이……,
시간의 뒤안길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린 어떤 마음이……,
지금도 그리운 어떤 마음이........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s010534
2008.05.31 13:20
갑자기 떠오른 건데요...
장진 감독님의 (아는여자)에 보면요 여자가 야구장 관중석에서 남자에게 이런말을 하죠...
"사랑하면 잡아 이 등신아"
앞으론 사랑하면 그냥 잡으세요...남자답게....인생 머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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