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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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할아버지는 영화를 만든다

b612b613
2008년 06월 01일 12시 55분 17초 2237 5
할아버지는 그렇게 된 게 대거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 때도 역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고 하지만 그런 능력이 못되어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도중에, 원래 늙은이는 죽을 시기가 가까운 거지만, 그게 바로 코앞까지 다다랐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할아버지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암이라고 친절히 말해주었다. 할아버지는 암을 진단받는 여느 사람들처럼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단지, 내가 찍고 있는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완성돼야 하는지 그때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손자인 나, 즉 할아버지의 가족은 일단 할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TV에서 보는 것처럼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겠다는 할아버지의 완강한 고집도 없었고 하지만 TV에서 보는 것처럼 할아버지가 암을 진단 받으셨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TV에서는 그 이상의 진행은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조금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할아버지를 방문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할아버지의 모습은 보이기도 전에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먼저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문소리를 듣고 버럭 화를 내셨기 때문이었다.
뭐가 이렇게 늦는 게냐! 죽기도 전에 숨통 끊어지겠구나!
아버지, 죽는다는 무서운 말씀마세요, 그리고 이해도 안 된다고요.
하긴, 죽기도 전에 숨통 끊어지다니? 죽는 거나 숨통 끊어지는 거나 죽으면 숨통 끊어지는 거고 숨통 끊어지면 죽는 거 아닌가? 참고로 할아버지는 어휘력이나 문장력이 굉장히 안 좋으셨는데 그 말들을 다 이해하느라 우리는 매번 애를 먹었다. 그래서 우리, 이번에는 할아버지를 포함한 네 명은 대화의 양이나 횟수가 적을뿐더러 할아버지의 일방적인 호통이나 훈계를 들어야했다. 뭐 견뎌낸다거나 버텨낸다는 말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자기가 영화감독이 될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로 저 어휘력과 문장력을 꼽았는데 그것은 자기가 딸리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이 말도 이해가 안 갔다. 적어도 저 당시에는. 할아버지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가슴팍엔 카메라를 올려놓고 있었다. 물론 빨간 불빛이 우리를 향한 채.
아버지, 그런 건 이제 좀 내려놓으세요,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그래요 아버님, 이이 말이 맞아요. 전자파가 얼마나 해로운데요.
사실, 어휘력이나 문장력은 모르겠지만 나는 저 말들도 이해가 안 갔다.
닥쳐라. 지금 영화가 나를 엿 먹인단 거냐.
이 말도.
우리가 침대로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그보다 세 명이 모두 안으로 들어서고 문을 다 닫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다급하게 말했다.
오지마! 아니아니 젠장할, 천천히 오라고. 한명씩 클로즈업 할테니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선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것처럼 우물쭈물 거렸다.
이런 모자란 것들! 이게 사진긴 줄 아는 게냐. 움직여, 움직이라고. 나한테 와야지!
우리가 힘겹게 다다르자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아빠가 잠깐 들고 있게 하더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불안에서 평안을 되돌려 받은 어린아이처럼 그가 말했다.
이리 다오.
카메라를 건네주며 아빠는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지만 할아버지는 카메라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새
염병, 자연스러워야 된다고! 자연!
라고 말하는 그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찍은 우리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건 다큐멘터리야. 근데 이게 말이 되니? 오, 세상에! 사람이 걸을 줄을 모르는 게냐?
맙소사, 할아버지는 자연스러운 다큐멘터리를 원했던 것이었다. 솔직히 우리는 할아버지와 함께한 평생 동안 그가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할아버지의 이미지 정도는 익숙했으나 하지만 그가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나중에, 자신이 암을 진단받고 입원한 후 처음으로 그를 방문하는 가족의 모습을 찍기 위해서 3시간 동안 누워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가 문을 열고 처음 보게 된 모습, 가슴팍에 카메라를 올려두고 꼼짝없이 누워있던 그 모습 그대로.
내가 욕창으로 곪아터지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
아버지, 그건 좀 과한 말씀이세요.
너는 상상력이 너무 부족해.
할아버지의 카메라가 우리를 향한 정도에 그렇게 우물쭈물 거렸다니, 과연 우리는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했었던 것이었다.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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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10534
2008.06.03 13:50
"지나친 상상력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기도 하죠"
Profile
sandman
2008.06.03 22:46
우공이산..
(본문내용은 못읽었음..
s010534 글 리플로 답^^)

가독성 좀 높혀주세용~~
b612b613
2008.06.03 23:46
상상이나 상상력에 겁먹어야 겁먹는거고
상상이나 상상력에 비겁해져야 비겁한거지
상상이나 상상력이 사람을 비겁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상상이나 상상력이 지나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나치건 아니건
그럴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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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010534
2008.06.04 09:27
비도 오고 출출하기도 하고 마침 올드보이 있길레 올드보이 보다가 님께서 머 상상력 머 그런예기 하길레
올드보이에서도 머 상상력 그런예기가 나오길레 그래서 그냥 쓴거지
상상이나 상상력에 겁먹어야 겁먹는거고 상상이나 상상력에 비겁해져야 비겁한거지 상상이나 상상력이 사람을 비겁하게
만든 건 아니라고 보는걸 굳이 따질 생각은 없고
님이 한소리가 무슨소리인지 해석하는데 조금 속상했 습니다.신경도 많이 썼고요.^^
결론은 제가 님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리플을 단건 아니구요...오해라구요 사랑해요♡^^
b612b613
2008.06.23 01:54
그랬었군요
남을 속상하게 하다니 이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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