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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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내가 너를 사랑했을까

ty6646
2008년 06월 08일 22시 54분 46초 2070 2
그렇게 긴 머리카락도 아닌데 걸거치는지 머리를 뒤로 묶었다.
귀엽고 예쁘게 묶은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누가보면 대충 뭉텅그려 묶어 놓은 듯한 거친 솜씨였다.


시골에서 막 모내기를 하다가 올라 온 듯한 검으텡텡한
그녀의 피부색은 햇빛에 반사되어 짙은 윤기를 뿜어댔지만,
그 위력은 남자못지 않게 호탕하게 웃어재끼는 그녀의 웃음소리만 못하였다.
가슴만 볼록하게 나오지 않았다면 남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을거다.


그런 그녀와 난 같은 학번이었고, 같은 과였기에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어버렸다.
나보다 한살 위였지만 내 누나콤플렉스는 그녀에게만은 통하지 않았다. 누나도 누나나름이지,
부드럽고 안기고싶고, 의지하고 싶은 누나에게만 통하는 그런 거였나보다. 내 누나 콤플렉스는....
아무튼 그녀는 같이 옷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도 아무렇지도 않을 그런 친구였다.






그녀의 정체는 운동권이었다. 90학번. 그때까지만해도
군부독재의 전통이 찬란하게 이어지던 노태우시절이었던거다.
그러고보니 내가 아주 구시대의 사람같다. 아무튼 그녀는 치열하게 싸웠고,
난 가끔 싸웠다. 그녀는 치열하게 참가했고, 때로는 앞에 나서서 선봉하기도 했지만
난 가끔 참가했고 어줍쟎게 밀려서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_-)


해마다 지리산을 찾아다니며 전투의식을 고양시키고, 다른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가슴에 불지르는 힘을 키워나갔다. 늘 대자보를 붙이고 떼고를 반복하고,
늘 수건을 목에 두르고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땀을 닦고 지냈다.


그리고 저녁이면 대학가 길 한모퉁이에서 허연 파전한장을 피자만들듯
전부 겨워내며 힘들어하고 있었고, 안쓰러워 돌아보면 다시 어디선가 마시고
노래하고 어깨동무하며 악을 써대고 있었다.


저게 여자야, 남자야.........(-_-)






난 그때 그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투사라고 생각했다.
늘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그녀를 보면서 앞이 깜깜해지는 것도 많이 느꼈다.
당시만해도 안기부라던가 경찰에 잡혀가서 고문이니 투옥이니 당하는
운동권 학생들이 연일 뉴스에 보도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난 그녀가 조금은 살살 했으면 싶었다. 살살하면 싱거운지
그녀는 정면으로 밀고 나가버리는 행동파였다. 한참을 보이지 않으면
어디어디 구치소에 들어가있고, 간만에 만나면 얼굴에 멍이 잔뜩 들어있기도 했다.


그럴땐 내가 나서서 람보나 코만도처럼 이나라 대가리들을 전부 쏴 죽여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난 조용히 살아가길 원하는 소시민이었기에 그런건 잘 참았다. 참는건 내 특기이기도 하니까(-_-)
아무튼 그런 그녀가 안타까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녀가 거칠게 뛰어다니고,
무식하게 싸워대도 그녀는 여자다. 힘으로치면 나보다도 못한 여자인 그녀이기에 난 늘 조마조마했다.






그녀, 언제나 싸움만 하는건 아니다. 화창한 봄날보다 더 싱그러운 미소도 뿜어대고,
뙤약볕의 햇살보다 더 강렬한 레이저 같은 윙크도 보낼 줄 아는 싱싱한 젊음, 그 자체였다.
그래서 학교에 있으면 그녀가 어디에 있는 줄 대번에 알 정도였다.


어디서건 들리는건 그녀의 웃음소리였고, 햇살에 부서지듯 반사하는 구리빛 얼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뛰어다니기엔 부담스러워보일 정도의 큰 가슴도 가끔은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운동권이라고 비운동권인 나를, 그리고 다른 친구들을 비난하거나 얕보지 않았다.
같이 수업듣고 같이 레포트 작성하고, 같이 점심먹으로 구내식당에 가고,
그럴때면 그녀가 언제 그렇게 피나도록 싸움박질을 하는 여자인지 전혀 표가 안날정도였다.
그다지 귀여운 얼굴은 아니지만 자세히 보면 구리빛 얼굴에 깊게 패인 웃음자국이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끌어들일 정도로 선명한 인력도 발휘하고 있다.


그런 그녀이기에 언제인가부터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내 마음안에서 자라가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그녀이기에, 그리고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싸운다는 저 순수한 땀방울이 있기에
난 그녀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키워가게 되었나보다.






그러던 어느날 늦은 오후, 집에 가다말고 자료실에 두고온게 있어 다시 들렀다. 그녀가 혼자서
뒤돌아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난 자료실 문을 열다말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나에겐 그것이 정말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녀가, 그녀가 담배를 피우다니. 난 여자가 담배피우는데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왜 남자만 피우라는 법이 있나. 같은 사람인데 남자가 하면 여자도 할 수 있는거 아닌가... 하고
늘 자신은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양 떠벌리고 다녔었는데.....


막상 내 눈앞에서 담배피우는 그녀의 모습을 목격했을땐
마음이 쿵쾅거리고 흔들리고 정신도 아늑해져가고 있었다.
나의 이 이율배반적인 본능은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너 담배도 피우냐 ?
응 가끔
몰랐다 야. 니가 담배를 피우는지
담배 맛 같은건 몰라. 습관도 아니고. 그냥 가끔 피울때가 있지


자료실을 돌아 나오는 내 발걸음은 진도 5.0 정도로 흔들리는 땅을 밟고 나가는 사람처럼
심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내 마음은 더욱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담배를 피운다. 그녀가 담배를 피운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저녁을 먹으면서 난 주위의 담배피우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버렸다.
왜 다른 여자들이 피울땐 안그랬는데 그녀만은 이렇게 심란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날의 마음은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는 반란으로 기록되어 내 마음 어딘가에 던져버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 다음해 학교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의 모습은 신입생때의 모습이나 7년이지난 그때의 모습이나 하나도 변한게 없어보였다.
한 30년쯤 지나야 조금 달라보일까, 그렇지 않는 한 그녀의 모습은 늘 그대로 일 것 같았다.
입이 양귀에 걸린 채 활짝 웃으며 오랜만이다라고 먼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너도 피부미용 같은 거 좀 해야하지 않나.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새카맣게 태워서야 시집이나 가겠냐' 하고 나도 받아치며 웃었다.


언젠가의 찌뿌등한 기억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리고 그런 내 마음에 안심되었다.
그래서인가, 니 새카만 피부가 무척 건강하고 좋아보인다. 그게 니 매력이기도 하다라고 해 주어야할 말이
어딘가 반대로 번역되어 내 입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 같았다.
진담을 농담으로 주고받는게 우리사이라고, 그리고 진심은 가려도 서로에게
투명한 유리상자속의 마음처럼 전부 다 보이는거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나 곧 결혼해
(-_-)...........어 그러냐
다음달에 하는데 너도 올거지
다음달에 ? 누구야 ?
응, 정외과 90친구
그렇구나. 90.... 90이라면....
그래. 나보다 한살 어리다



나보다 한살 어리다
나보다 한살 어리다
나보다 한살 어리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세번쯤 내 머릿속에서 리피트되어 들려왔다. 나도 너보다 한살 어린데.
내가 그 놈보다 널 먼저 알았는데. 그런데 나도 널...... 마음에 두었었던가?
내 마지막 의문부호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 후로도 계속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는 질문으로 굳어갔다.
나도 그녀를 좋아했던가, 사랑했던가 ?






난 그녀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그때 고시원에 있었던 것 같다.
법전을 보다가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한가지 기억이 글자를 쫒던 내 눈길을 멈추게했다.
6-7년전 어느날, 심한 데모로 그녀가 유치장에 들어가 있었을 때,
긁힌 상처투성이임에도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언젠가 변호사가 되어 니가 마음놓고 운동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어야지하고
혼자 속으로 마음먹고는 그 후로 줄곧 잊어버렸었던 그 마음이
그날 그 차가운 고시원 한 귀퉁이에서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내 마음의 한조각이 이제서야 기억속에서 밖으로 나온다.
달력을 보니 지난주가 결혼식이었다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자판기커피에 동전을 넣다말고 문득 생각한 것은
역시 자판기 커피는 우리대학 것이 싸고 맛있어......였다(^^)


그 후 지금까지 그녀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아니,
그녀의 소식이 들려오는 반경안으로 내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했고, 난 변호사가 되지 못했고,
그리고 내 마음의 기억은 불완전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변명해본다.


가끔 떠올려본다. 군에 가기 전에 그녀가 술마시다말고 내게 한 말이
내가 만들어낸 상상일까 아니면 실제로 내게 뭔가를 전달하려고 했던 그녀의 메시지였을까를.......



『야 너 오늘 나랑 잘껴 ?』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lobery
2008.06.10 10:33
그녀를 사랑하셨군요...
tls0714
2008.06.15 23:39
그 녀를 사랑 하셨군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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