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369 개

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죽여도 될 것 같았다.

sadsong sadsong
2008년 10월 07일 22시 21분 14초 2556 4
쑤어싸이드밥.jpg

#
그 정도면 죽여도 될 것 같았다.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이미 결정된 것 같았고
지하철 객차 안을 징그럽도록 가득 메운 인간들은 생각없거나 예의없이 내 몸을 밀어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짜증들 때문은 아니었다.

야구모자를 쓴 내 앞의 그 남자.
왼손으로는 -모자 아래로 드러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어쩌면 두피를 긁는) 행동을
이상하리만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고급스런 휴대전화를 들고 DMB를 시청중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웃기 시작한다.

그 것이 부디 잔잔한 미소로 그치길 나는 바랐으나
여전히 뒷머리를 매만지고(또는 두피를 긁고) 있는 그의 입은 점점 벌어져 간격을 넓히기 시작하고
이제는 아예 아래 윗니가 다 보일 정도로 입을 벌려 히죽거리는 지경에 이른다.

그 것이 부디 단발성 웃음에 그치길 나는 다시 한 번 바랐으나
휴대전화에 몰입된 진실어린 눈빛과 그 해맑거나 멍청한 웃음은 그침 없이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내 안에선 그런 그를 죽여도 되겠다는 생각이 빠르고도 굳게 자리잡기 시작한다.

그가 몸을 틀 때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던 그 방송은
연예인들이 전국을 돌며 뭔가 한지랄들씩 하는 그런 오락프로그램인듯 하다. 아마도.
하지만 그 것이 어떤 프로그램이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래,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나와 만나고 헤어지기까지 적어도 십팔분 이상의 시간을
그는, 방송을 보며 즐겁고 순수하게, 넋을 놓고 이를 드러낸 채 계속 웃었을 뿐이고
나는, 그 바보같은 웃음에 마음 튀틀려 그를 죽여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 뿐이다.

티비라는 매체에 의해, 그런 자리 그런 상황에서, 그 정도로 바보처럼 웃는 이라면
이쯤에서 그만 죽어줘도 될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그의 가족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
우연히 알게된 '쑤어싸이드 밥'이라는 게임의 발칙함에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나도 모를 감정으로 갑자기 그 발칙함이 떠올라 몇 년만에 그 게임을 다시 검색해 찾아냈고
오랜만에 만난 '밥'을 가볍게 몇 번 '쑤어싸이드' 시키면서는 새삼 묘한 감정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누가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그로부터 채 스물네시간도 지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접하게 된 가슴 멍한 '쑤어싸이드' 소식.
....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마음을 추스리면서
하필 내가 그때-왜-갑자기 '밥'을 다시 떠올려 끄집어냈고 또 자살시켜야 했던가 하는 자책 아닌 자책에 더해
그녀에게 왠지 모를 미안함이...



sadsong/4444/ㅈㅎㄷㅈ
===================================
그녀 자신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겠지.
===================================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kinoson
2008.10.08 14:19
PLAY 클릭했습니다 ;;;;;;;;;

누르면 게임이 시작될줄 알았습니다....
Profile
kinoson
2008.10.08 14:23
다른건 몰라도 악플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필요할것 같습니다.

하긴 주구장창 법만 만들어대면 뭐하겠습니까...

기본적으로 인간이 먼저 변해야겠지요..

그러면 참 좋을텐데 말입니다.
Profile
xeva
2008.10.08 14:51
나두..그럴 줄 알았는데...
mojolidada
2008.10.09 12:01
글을 보는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클릭하게 만드는 형의 낚시술에 찬사를 보냅니다.

아는 여자친구는 이어폰도 없이 디엠비를 보는 뒤에 앉은 한 남자를 향해
'저기요 공공장소에서 예의 좀 지키시죠'
대꾸 없이 디엠비를 껐던 그 남자는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없이 무슨 생각인지 뜻 모를 미소만 지었데요.
내릴때가 다 돼서 벨을 누르고 뒷문앞에 섰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그 남자가 뒤에 미소를 띄며 서 있더래요.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안 내리고 자리에 다시 앉아 뒤를 봤더니 내리지 않고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띄는 그 남자.
버스 기사님 한테 얘기하려니 자신이 도리어 이상한 여자 취급당것 같아 말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국 번화가로 내렸더니 그 남자 역시 쫓아 내렸답니다.
쫓아 오나 싶어 뒤를 돌아보면 모르는 척 고개돌리고 구두신고 도망칠 주력도 안되고
결국에는 여기저기 전화를 했고 근처에 사는 친구가 나와줘서 위기(?)를 모면했다더군요.

무서운 세상입니다. 죽여버리기 전에 죽음을 강요당하니까요.
이전
9 / 69
다음
게시판 설정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