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시작이다

berkeleysam
2007년 06월 10일 12시 49분 04초 5492 2
트로피컬 마닐라 017.jpg

5/21

비행기에서 마닐라 냄새가 난다. 앞으로 1시간 후면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이다. 200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몇 개월을 지내면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헌팅 장소를 머릿속에 담아 놓고 늘 오늘이 오기만을 꿈꿔왔지만 그 꿈이 현실이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계속 고칠 때마다 과연 이 영화를 필리핀에서 만들 수 있을 까 늘 내 자신에게 묻곤 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이다. 수백 번 내 자신에게 무모한 짓이라고 소리쳐 보았지만 이미 난 무모함에 한발 짝 다가서고 있다. 배우도 없다, 스텝도 없다. 지금 이 비행기엔 오직 나 하나뿐이다.
미국에서 디지털 장편 영화를 같이 작업했던 촬영감독님에게 한 달 후 와달라고 부탁드렸지만 상업영화 촬영이 7월 중분부터 잡혀있어 스케줄 빼기가 쉽지 않으시단다. 여배우를 섭외했지만 확실한 확답은 받지 못했다. 밀려드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필리핀에서 배우를 구하지 못하면 한국에서 데려와야 하는데 그럴 만한 돈이 없다.
마닐라에서 배우도 스텝도 모두 구해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트로피컬 마닐라 시나리오와 열정뿐이다. 드디어 마닐라에 도착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더위가 내 몸을 감싼다. 기분이 좋다. 영화를 찍을 마닐라에 왔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5/22

마닐라 퀘손시 BF Homes.
한국인 아주머니가 주인인 하숙집에서 아침을 맞았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다. 아침부터 촬영지 헌팅을 갔다. 지프니를 타고 갔다. 택시비 1000원을 아끼려고 140원짜리 지프니를 타고 2년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탄당소라 시장으로 들어섰다. 전쟁터처럼 수 십대의 지프니와 트라이 시클, 그리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다. 먼지와 소음이 너무 편하게 들려온다.
카메라를 꺼내자 사람들이 몰려온다. 특히 아이들이 다가와 카메라를 만지고 돈을 달라고 자꾸 옷을 잡아끈다. 6살도 안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젖먹이 동생을 안고 나에게 손을 내민다. 마음이 흔들린다. 주머니에 손이 들어갔지만 이 아이에게 돈을 주면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2년 전에 돈을 한번 줬다 수십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진땀을 흘린 적이 있어 그냥 독해지기로 했다. 저녁에 이번 영화에 조연으로 첫 출연이 결정된 호성이형 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호성이형은 같은 비행기에서 만났다. 약간 비열하게 생긴 얼굴이 맘에 들어 출연을 부탁했는데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이 곳에서 7년동안 하숙집을 운영하신 아담 하숙집 아저씨를 만났다. 이분에게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 까 기회를 엿보다 술자리에서 도움을 청했다. 아저씨가 대뜸 필리핀 배우 섭외와 장소를 모두 알아봐 주신다고 하셨다. 남자 주인공으로 적역인 남자를 알고 있다며 내일 만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술맛이 갑자기 좋아졌다.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릴 줄이야...25일날 첫 미팅을 갖자고 하셨다. 즉석에서 필리핀 현지 프로듀서 자리를 드렸다. 시나리오 내용을 들으시더니 하숙집에 살고 있는 남자 배우가 적당할거 같단 말씀을 하셨다. 30살 중반의 남자 주인공역이다. 이 역을 마닐라에서 찾지 못하면 한국에서 배우를 불러 와야 한다. 연기력이 떨어져도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한국 남자가 내겐 더 필요하다. 내일 그 배우를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떨려온다. 아, 영화 찍으려고 점점 사기꾼이 되어가는 것 같다.

5/23

프로듀서님이 소개해준 남자 배우를 만났다. 33살이지만 무척 동안이다. 너무 잘생긴 얼굴이 맘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아니라 의향을 물었다. 한참 동안 내 영화 얘기를 듣더니 못 할 거 같단 말을 했다. 사업을 시작했는데 무척 바쁠 거 같다고...그렇게 큰 실망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배우 구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예상했으니까...
에바라고 불리는 백화점 앞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며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15살 가량의 코피노(한국인과 필리핀인 혼혈아)를 찾아야 한다. 코피노를 찾지 못하더라도 한국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를 찾아야 하는데 몇 시간 동안 길거리 캐스팅을 하다 보니 이런 식으론 힘들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한국 사람처럼 생긴 몇 명에게 다가가 출연 의향이 있냐고 물었지만 우선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영어권 국가라 해도 영어를 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영어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데 정작 상대방이 알아 듣지 못해 문제다. 이 나라 언어인 따갈로우를 배워야 할 것 같다.

5/24

영화에 주무대가 될 주인공 가족 집을 섭외하러 다녔다. 우리나라 70년대 판자촌 동네를 갔다. 사람들 얼굴의 구김살이 없다. 행복하게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촬영 허가를 부탁하러 몇 집에 들어갔지만 너무 비좁아 촬영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수 십 군데 집을 다녀봤는데 맘에 드는 집을 찾기 쉽지 않았다.
언어 소통도 문제지만 정작 과도한 장소비 요구가 말썽이었다. 마음에 든 집이 있었는데 주인 아저씨가 무척 많은 돈을 요구했다. 집이 워낙 맘에 들어 달라는 돈을 다 주고서라도 섭외하고 싶었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집 아들이었다.
허름한 자기집에서 촬영한다는 말에 무척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자꾸 나가라고, 꺼지라고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최대한 예의를 지켜가며 영화에 대해 설명했지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찍으려 하는 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그 집을 나왔다. 며칠후에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
무덥던 날씨가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우산도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며 차를 타러 걸어 나왔다. 택시를 잡아탔는데 돈을 더 달란다. 아, 어디가나 이 나란 한국 사람들을 봉으로 알고 있다. 택시비 천원에 실랑이를 벌이다 중간에 내렸다. 천원이 문제가 아니라 필리핀에서 매번 반복되는 이런 바가지 시위가 오늘은 짜증이 났다. 집까지 걸어왔다. 온 몸이 다 젖었다. 젠장....기분이 영 우울하다. 아, 정말 내가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혼자라 더욱 외롭다.

5/25

오늘은 아침부터 바쁘다. 아담 하숙집 프로듀서님이 같이 일할 스텝과 필리핀 배우들을 불러 모아 첫 미팅을 갖기로 한 날이다. 가나 하숙집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면서 영화에 관해 간단한 프레즌테이션을 할 예정이었다. 영어와 한국어로 된 일종의 영화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다. 영화 시놉시스와 한국에서 결정된 음악 감독님, 촬영감독님, 그리고 여배우 소개, 그리고 감독이자 제작자인 나의 소개와 촬영 일정, 그리고 촬영 후 계획등을 담은 계획서를 만들었다. 괜히 들뜬다.
예정보다 3시간이나 일찍 가나 하숙집으로 갔다. 그러나 프로듀서님이 갑자기 일이 생겨 프레즌테이션이 취소가 되었다. 다리에 맥이 풀린다. 하숙집 주인아저씨에게 억지로 프로듀서를 시킨 내가 잘못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3주후면 한국에서 올 여배우와 메신져를 했다. 화가 난 상태에서 메신져를 하다 여배우와 마찰이 생겼다. 여배우 자존심을 긁어버렸다. 화가 난 여배우가 그냥 나가버렸다. 젠장...되는 일이 없다. 큰일이다. 여배우가 안 온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다. 그 여배우는 자비로 오기로 돼있다, 몰론 출연료도 없다. 그 배우를 놓치면 크나큰 경제적 손실과 함께 영화에도 타격을 받는다. 원래 그 역은 주인공 남자의 부인역인데 필리핀 여자가 맡아야 한다. 그러나 영화상에서 여배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면을 쓰고 나온다. 얼굴에 화상을 입어 한국인 남편이 한국에 잘 나가는 여배우 사진을 오려 만든 가면을 씌우기 때문이다.
여배우에게 사과의 이메일을 보냈다. 화가 풀려야 할 텐데...

5/26

핸드폰을 샀다. 핸드폰이 없으니 기동성이 없다. 지금 이곳은 한국 드라마 주몽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핸드폰 파는 여자가 내 얼굴이 송일국과 아주 조금 닮았단다. 하간 한국에 있을 때 내 별명이 짝퉁 송일국이었으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핸드폰 팔아먹으려고 던진 사탕발림에 내가 녹아들었다. 졸리비라는 햄버거 가게로 콜라를 먹으러 들어갔는데 여종업원이 나보고 누굴 많이 닮았단다. 주몽 때문에 내 인기가 상한가다. 송일국씨가 고마울 뿐이다.
콜라를 마시면서 다시 배우 사냥을 나섰다. 하루에 여기 돈으로 500페소를 출연료로 책정했다. 우리 돈으로 12000원 정도인데 이 나라 은행원 월급이 15만원, 선생이 18만원, 가정부 8만원의 인건비를 감안하면 500페소는 큰 돈이다. 열흘만 잡아도 5000패소 12만원이다. 10일 일하고 한달치 월급을 받는 것이니 다들 관심이 대단하다. 몇 명 눈에 띄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길거리 캐스팅이 성사됐는데 문제는 노출이다. 영화에서 몇 장면 벗어야 한다고 말했더니 다들 난색이다. 부모님한테 혼날거라고...그 말을 들으니 내가 참 사기꾼 같다. 돈 십만원에 순진한 애들을 꼬시다니...
하루 종일 수 십명과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대부분 날 붙잡고 시켜 달라고 애원했지만 정작 맘에 든 사람은 없었다. 아, 배우 찾기 정말 힘들다.

5/27

30대 중반의 한국 남자 배우를 찾아야 한다. 최악의 경우 내가 하리라 맘먹고 왔지만 막상 연기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부담이 크다. 아, 자꾸 한국 배우들이 생각난다. 필커에 올라온 배우들 프로필을 봤다. 맘에 드는 몇 몇 배우들이 있었는데 비행기표와 체재비, 그리고 출연료가 문제다. 맘에 드는 몇 몇 배우에게 비행기표만 줄 테니 와 줄 수 있냐고 전화를 할까하다 사기꾼 소릴 들을까봐 다이얼을 돌리지 못했다. 그렇게 배우들을 싸게 대하면 나도 대우 받기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에 자꾸 망설여진다.
배우 구하러 또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구해야 할 텐데...30대 중반의 한국 남자처럼 생긴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찾는 이미지다. 다가갔다.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보자마자 영화 얘기를 꺼냈더니 미친놈 보듯 날 쳐다본다. 술 한잔 하면서 얘길 하자고 했더니 바쁘단다. 하긴 아무리 필리핀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영화 출연 해달라고 부탁을 했으니 날 이상한 눈으로 보는 건 당연하다.
내 전화번호를 줬는데 끝내 전화는 오지 않았다.

5/28

시간은 자꾸 가는데 해 놓은 일이 하나도 없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하려니 도대체 일이 진척이 되질 않는다. 이럴 때 하늘에서 프로듀서가 뚝 떨어져 일을 도와 주면 좋으련만...
아침부터 최종 시나리오를 손보고 있다. 헌팅을 하면서 추가된 씬과 여러씬을 삭제했다, 제작비 문제로 여러 씬들이 삭제된다. 어쩔 수 없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씬은 첨부터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여배우에게 메신져가 왔다. 화가 풀린 모양이다. 사과 메일이 통한 것 같다.
오늘 밤, 어제 만난 17살짜리 필리핀 남자 배우와 약속이 있다. 영어를 곧 잘 해 나와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는데 연기력이 문제다. 리딩을 시켜 볼 생각이다.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berkeleysam
글쓴이
2007.12.29 13:12
lobery
예전에 저와 일했던 분과 이름이 같군요... 제작일지 재밌게 읽었습니다... 더운데서 고생하시군요... 2007/05/29 04:07:33


79ass
제작일지 참 재밌고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글속의 뭍어나는 영화에대한 건강한 열의 만으로도 나이스하단 생각이 듭니다
저는 배우활동을 하고 있는데 단역이지만 장편두편의 촬영이 있어서 달려가 도와드리고 싶은데 여의치가 않네요...
꾸준히 제작일지를 써주시면 재밌게 읽을께요~
어떤 영화의 장르가 나올것인지 무척 궁금도 하구요
혹 관심가는 부문이 있으시다면 연락주세요
건강하고 아름다운 영화 만드시길 바랍니다
화이팅!

아~참 그리고 제 이메일은 79ass@hanmail.net입니다^^ 2007/06/01 16:53:44



image220
오랫만에 제작일지다운 제작일지를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을 보냅니다. 2007/06/01 19:44:37


dreamer1229
상우형! 제가 곧 달려가니까 힘내요 2007/06/08 22:14:18


freedocu
당신의 영화제작기를 다큐로 찍는게 영화 보다 더 재미있을듯하오.
(다큐를 끝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들기는 하지만..^^*)
KBS 인간극장에 소재제보를 할 생각이오.
당신의 허락이 없지만 이 제작일지를 그대로 올릴까보오.

시나리오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엉뚱하고 가끔 기발하기도 한 당신의 냄새가 그대로 드러나는 그런 영화를 기대하오.
지금 충무로는 작년 이맘때와 180도 상황이 바뀌었지만,
당신과 같은 모험가들이 있기에
충분히 이런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을거라 믿소.

그럼 타국에서 몸조리 잘하시오.
종종 연락드리겠소.


당신의 영원한 러버... 2007/06/09 14:27:49


SWIMMING
시나리오 를 들고 영화속 배경의 필리핀 쾌존 탐당소라 지역을 뛰고 걷고 뛰고 ,,

CHEK CHEK ...하시며 온몸에 땀이 뒤범벅 되신 이상우 감독님을 뒤에서 보면서 ..

이번 영화에 대한 감독님의 열의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저 김두식 도 감독님과 함께 열과 성의를 다해 이번 영화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두식. 2007/06/11 13:52:12


musicalsoul
타지에서 너무 고생하는것 같아요..
힘내시구요..
제가 도움이 될수있다면..연락주세요^^ 2007/06/15 13:03:32


producer0815
이 감독,,,정말 미쳤군...몇 달전까지 한국에서 영화 준비하더니...언제 필핀에 가서...시나리오 보내게... 2007/07/09 00:17:30


iactor
새롭게 느껴지는 열정과 행복감입니다.
언젠가는 어떤 포지션이건 함께 작업한다면 즐거울듯 싶습니다.

점점더 순탄하게 작품 진행 되시길 기원합니다....^^ 2007/07/22 23:42:31
filmbuff
2008.02.26 16:09
재미있네요...
1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