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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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호흡에 관하여

junsway
2005년 11월 18일 01시 22분 29초 1495 3 2
선배하고 술을 먹는데... 참고로 이 선배는 정말 축구를 좋아하는 선배다.

"너 차범근과 히딩크의 차이가 뭔지 아니?"

"글쎄요." 알 턱이 없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것 중에 하나가 축구라고 생각하니까....

"둘 다 유럽식 축구지. 미드필더에서 상대편을 강력하게 압박하거든. 그런데 말야, 이 압박축구라는 것이 강인한 체력이

뒷밤침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거든. 차범근 스스로도 독일에서 그렇게 보고 배웠으면서도 왜 한국에서는 대표님 감독으

로 제대로 하지 못했을까? 말이 통하지도 않는 히딩크는 했는데 말이야."

역시 의문이다. 나로선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항이다.

"문제는 아까 말한대로 체력이야. 강인한 체력. 히딩크는 묵묵히 팀이 패하면서까지 대표팀의 체력을 키웠지. 차범근은

머리속에서만 있었지, 결국엔 실패했구....."

정말 히딩크가 16강 전을 대비한 체력을 정확히 키웠을까?

호주 대표팀이 삼십 몇년만엔가 월드컵 본선에 올랐다는 데 그 뒤에 또 히딩크가 있었다.

언론에서는 마술이니 마법이니 히딩크를 추켜 세우기 바쁘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체력 = 승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압박축구라는 게 들어가면 좀 뭔가 달라진다. 왜냐, 훨씬 구체적이니까....


한때 영화사 기획실에서 참 많은 시나리오를 읽었다.

지금도 지인들이나 아는 분들의 시나리오를 많이 모니터링 해준다.

그런데 그 많은 시나리오를 읽다 보면 자꾸 축구 생각이 난다.

초반에 열라 빡세게 잘 나가던 시나리오가 중반 이후 갑자기 나락으로 빠지며 형편없는 시나리오가 되기도 하고

초반엔 밋밋한데 갈수록 힘을 발휘하며 마지막에 한방을 내지르는 시나리오(물론 이런 시나리오는 참 드물다.)


축구나 시나리오나 자꾸 호흡에 대한 문제가 마음에 부담이 된다.

30씬, 60씬, 90씬, 120씬으로 네 단계로 나누자면.... 단계마다 정말 잘 끌고 오는 시나리오들이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은 소위 말하는 구성점에서 망가지면서 뒤가 완전히 호흡이 끊기는 시나리오가 많다.

영화 시나리오가 이럴진대 드라마 주말연속극이나 일일드라마는 오죽할까?

30씬까지 잘 쓰는 시나리오는 정말 많다. 그러나 그 다음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끝까지 정말 지루하고 뻔하다.

60씬까지 잘 쓰는 시나리오도 꽤 봤다. 그러나 그 다음은 똑같다. "또 시작이군 시작이야."라고 말하면 된다.

90씬까지 잘 쓰는 시나리오는 드물다. 작가의 뚝심도 대단하고 머리가 굉장히 좋은 경우다. 그러나 클라이막스에서

조진다. 정말 안타깝다.

120씬까지 잘 쓴 시나리오는 백의 하나, 천의 하나다. 그런 시나리오는 일명 수작이라는 이름으로... 간혹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영화사에 남아있다. 이 정도 되면 작가나 감독을 달인의 경지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구성점에서 망가지는 작품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로 호흡들이 너무 짧다. 구성에서 너무 약하다. 크게 보지 못하고 지엽적이고 편협하다.

물론 나 역시 할말이 없다.


축구처럼 체질개선도 하고 강인한 체력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차범근과 히딩크의 차이를 생각해본다.

강인한 체력? 압박 축구? 그것도 분명 중요한 요소겠지...

그러나 그것보다는 90분 전체를 끌고갈 수 있는 호흡의 문제가 아닐까? 그럴려면 인내와 결단이 필요하다.

체력이 약해도 호흡이 정확하면 경기에 지더라도 멋진 축구를 할 수는 있다.

대패를 하더라도 무엇이 문제인지는 정확히...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보강할지도 알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시나리오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펄잼님 싸이홈피에 가보니까(요새 펄잼님 홈피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나리오 구성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고백이 있어서 공감했었다.

호흡은 곧 전략이고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면 좀 쉬었다 가고, 강렬하지 않아도 지루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로 글을 쓰고 있다.



아내나 여자친구가 두시간 동안 섹스하고 싶어하는데

30분만에 사정하고 곯아 떨어지는 그런 무례한 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볼려고 아둥바둥대고 있다.

필커 가족 모든 분들..... 풀타임 메이커로 거듭 나시길 기원하며....

(펄잼님.... 언제 우리 술 마셔요?....하하하... 드라마 잘 되시길...)



마틴 트레비스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pearljam75
2005.11.18 10:51
오마니나! 그, 그게...
-.-;;;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아이쿠.... 제가 이름을 갈쳐드렸군요. 방명록에 자취를 남겨주삼. 흐.

근데... '30분만에 사정하고 곯아 떨어지는...?'
쳇, 제 친구 J씨는 MIT박사출신의 남친이 마의 3분 벽을 깨지못해 늘 욕구불만,
황정민같은 등빨좋은 농촌총각에게 시집가 밤마다 질펀하게 놀어보는게 소원이랍디다.
73lang
2005.11.18 14:46
영화 : 가장 상업적인 런닝타임 99분

축구 : 전후반 90분 (전후반 injury time을 적용하면 평균 99분에 가까워짐)




영화감독 : 꼭 배우나 스텝출신이 아니더라도 감독을 할 수 있다. (작가출신이 많다.)
누가 맡느냐에 따라서 수정과의 잣같은 영화가 나올수도 있고 상콤한 영화가 나올수도 있다.
입으로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 (오랄무비를 찍는 감독들도 꽤 된다.)
배우(나 스텝)들을 소품이나 가축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

축구감독 : 선수출신들이다.
누가 맡느냐에 따라서 왕도 되고 거지발싸개도 되는 자리.
오로지 그라운드에서만 평가가 이루어진다.
선수의 기량이나 컨디션, 포지션상의 문제, 체력안배 등 전술에 따라 선수를 기용한다.






많은 시나리오를 접해 보지는 모댔지만

간혹가다 차두리 같은 (작가의) 시나리오들이 눈에 띌때가 있넌디요

볼터치와 드리블 등 기량이나 골감각이 떨어져

곳곳에서 눈에 띄는 실수가 자주 보이긴 하지만

강철 체력을 바탕으로 막판까지 열심히 뛰어댕기넌 차두리맨키루

결정적인 한방도 없고 세련되지 모다구 투박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그러다가 가끔씩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그런 시나리오들을 접할때면

'아띠! 시나리오 젖같네!'가 아니라

그 작가를 응원해 주고 싶은 경우가 종종 있도만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투자.제작쪽에 계신 분들은

어느날 하루 아침에 뚝 떨어지디끼 (원석을 찾아서 다듬을 생각보다넌 세련되게 가공되어 있넌 보석을 날루 먹으려는디끼)

죄다 박지성 같은 작가(의 시나리오)를 찾는 경우가 많은것 같은디요

주변을 둘러보면 수 많은 원석들이 널려 있슴미다요
(박지성 같은 선수도 처음에는 원석이었습미다요)


국대 선수들의 평가전에서

축구 캐스터라는 양반이 'A매치 3경기에 출전하는 조원희같은 저런 선수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요?'라고 말하는

조금은 쭈글쭈글하고 암울한 현실이

축구나 영화판이나 별반 다를것이 없다고 느껴집니다요


시나리오 구성뿐만 아니라

주변에 널려있는 원석들을 찾아 발굴하는 것도 긴 호흡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요




여러분 모두 건승하십시요

(__)
Profile
sandman
2005.11.19 19:09
펄잼님의 사이가 궁금하다... ㅎㅎ
모두들 재미있는 분석들...

ㅎㅎ

재밌군요.

호흡. 아주 중요하지요. ^^;

......... <= 말로 해서 뭘하리오....클클

73랑님의 좋은 지적...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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