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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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안녕, 엘레나.

moosya
2008년 02월 13일 14시 26분 28초 1809
누구에게나 로맨스는 있다. 잊을 수 없는 옛사랑에 대한 향수에도, 마음 속에 담아두고 말 못하는 순정에도 로맨스는 있다. 그것은 대상을 향한 그리움과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을 양분으로 삼는 나무와 같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기도 하고, 어느날 매마른 가지로 쓸쓸한 최후를 맞기도 한다.

내게 로맨스라는 달콤함을 알게 해준 것은 영화 시네마천국 속에서 토토와 엘레나가 나눈 사랑이다. 물론 숙녀 엘레나가 그것을 모를 수 없게 할 만큼 아름다워서기도 했지만 옛 사랑을 잊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노년의 토토와 엘레나는 진정한 로맨스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표본이 되어주었다. 물론 청년의 토토와 엘레나의 사랑도, 노년의 토토와 엘레나의 그리움도 모두 상대를 흠모하는 마음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 또한 로맨스에 포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로맨스는 어쩌면 그 누군가를 잊지 못하는 나에 대한, 혹은 그 누군가에 의해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 나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단지 감성에만 의존했을 때, 로맨스만큼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하고 애끓게 하는 것도 없다. 영화 속 토토와 엘레나의 사랑에 취해, 나에게도 그들과 같은 로맨스가 분명히 주어질 것이며 그들과 같은 순정을 발휘할 것이라는 다짐은 달나라를 상상하는 초등학생처럼 모호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로맨스의 순수결정체를 마냥 믿어버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왜 일까. 분명한 것은 좀에 갉아먹히듯, 로맨스에 대한 믿음은 아주 조금씩 쇠퇴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매마름 뒤로 나약할대로 나약해져버린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조건이 로맨스를 결정한다는 태제를 제시하려고 이 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조건들이 자아의 삶의 조건을 황폐화시킬 때, 그래서 삶이란 땅이 황폐해졌을 때 로맨스라는 한 송이 꽃은 끝내 피지 못하고 다시 씨앗이 되어 땅 속 깊은 속에서 긴 잠을 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로맨스라는 것은 그 대상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다. 어차피 로맨스의 주체는 자아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 씁쓸함. 철이 지나도록 잃지 않고 있던 로맨스에 대한 동경을 이제는 땅 속 깊은 속에 동면시켜야 한다는 자괴가 치밀어 오른다. 오~ 엘레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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