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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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박순경 이야기 (2)

vincent
2002년 03월 25일 01시 08분 56초 1115 4
'박순경'의 순애보를 이야기함에 앞서서 그의 순애보의 대상이 된 '미스공('미스 사이공'이 아니라는 말은 이제 그만하겠다)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미스공' 언니는 엄마의 의상실(아무래도 동네 '양장점'이 분명한)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미싱사였다. 이대앞 의상실에서 다년간 미싱사로 활동했다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며 이대앞에서 의상실을 하셨었다는(그러다 망했다는) 엄마의 눈에 쏙 들어와박혀 실력과는 상관 없이 자리 잡는데 성공했다.

'미스공' 언니를 처음 만난 그 날을 지금도 난 잊을 수가 없다.
집에 가봤자 밥 줄 사람도 없고, '조립식' 몇 개를 사다가 꼭 한 꺼번에 풀어놓고 이 로봇과 저 로봇을 섞어 만드는 산만한 동생을 지켜본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기에 나는 방과 후엔 꼭 엄마의 의상실로 먼저 달려가곤했다.
그 날도 고픈 배를 움켜 쥐고 의상실로 갔는데, 문을 여는 순간 정말 눈 앞이 환해졌다. 나를 맞아준 낯선 여자는 마치 오래 전 나를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그녀는.... 나풀거리는 하얀 블라우스에 나풀거리는 하얀 스커트에 나풀거리는 검고 긴 생머리를 한데다가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한, 잘못 보면 처녀 귀신 같고 정신 차리고 보면 청순이 도에 지나친 그런 여자였다. 그렇게 예쁜 여자는 내 생전 처음 보는거라서... 난 한순간 그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곧이어 엄마가 나타나서야 나는 말없이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하얗고 하늘거리는 옷자락과 긴 생머리를 나풀거리는 그녀가 난 처음부터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하얀 옷 중독증(내가 붙인 병명)'과 지금으로치면 '공주병'의 변종인 희귀병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나풀거리는 하얀 옷과 검고 긴 생머리를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없게 될 때까지 나는 지겹게 봐야만 했다.

'공주병의 변종인 희귀병'에  걸려있긴 했지만, 그녀는 다행히 마음씨만은 착했고, 동생과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혼자 서울 생활을 하느라 외로워서 그랬는지 '미스공' 언니는 우리를 자주 자신의 자취집에 데려갔다.
거기서 그녀가 소년 소녀 천사가 쌍으로 등장하는 표지의 바른손 일기장에 만년필로 예쁘고 작은 글씨를 깨알같이 적어가며 일기 쓰는 것을 봤을 때의 충격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숙제로 내주는 그림일기를 당장 때려치고 싶었고 나도 당장 바른손 일기장을 사고 싶었지만 글씨를 그렇게 쓸 자신이 없어서 당분간은 글씨 연습에 매진하기로 결심했었다.
그 때 연습한 글씨체가 내 '서체'를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우리를 데려갈 때마다 '에그 밀크'라는, 말 그대로 뜨거운 우유에 계란을 넣어 저은, 아이들이 먹기엔 다소 느끼한 음료와 수입상품점에서 샀을 촉촉한 쿠키를 '대접'해주곤 했다.
동생과 난 '미스공' 언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성의 때문에 느끼해도 참고 너무 달아도 참고 아주 맛있게 먹어주어서 갈 때마다 그걸 먹어야했다.
예의를 갖춘 채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난 나중에 일부러 집에 있는 코코아통을 지참하고 그녀의 집을 방문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녀는 우리가 좋아하는(?) '에그 밀크'를 끓여주었지만...

그녀는 23살이었다. 모두들 좋은 나이라고 했다. 조금 있으면 결혼할 나이라고들 그랬다. 나는 그녀가 나이를 먹지 말고 그래서 결혼도 하지 말고 오래도록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에그 밀크'를 먹는 괴로움 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 때문에 나보다 나이 많은 모든 언니들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엄마한테 '언니'를 낳아달라고 무모한 부탁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런 환상-'언니'에 대한 환상-을 깨어줄 강력한 존재가 나타났으니... 그녀가 바로 '영숙언니'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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