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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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좋겠고.. 그게 아니어도 커피 한잔쯤 옆에 있으면 좋겠고... 스피커에서는 끈적한 브루스나 나른한 보사노바 정도면 딱 좋겠고...

예의

vincent
2001년 11월 07일 04시 06분 34초 1031 3 3

새벽에 술 취한 채 전화거는 사람, 별로 안좋아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받는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걸 고려하고 싶지 않아서 새벽에, 만취된 채로 전화를 하는 것일테지.
물론, 정말로 절박하게 꼭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럴 땐 술 깨고 다음날 일어나서 맨정신에 전화하는 편이 후회를 줄이는 길이다.

오늘, 우연히 채팅방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재미있게 수다를 떨고 있는데 전혀 예상 못했던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다짜고짜 혀가 꼬이는 목소리로 잘 지내냐고 하고 혼자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말도 앞뒤가 안맞고 원망과 서운함 피로가 뒤섞인 넋두리였는데, 내가 가까스로 틈을 비집고 누구냐고 물었을 때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임을 밝혔다.
예전에 함께 일할 뻔 했던 감독이었는데, 각색 작업을 조금 진행하다가 아이디어만 조금 내놓고는 서로 작업 스타일도 너무 다르고 내가 고쳐가고자 하는 방향과 감독이 하고 싶은 영화가 너무나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나 나름대로는 정중하게 일을 접었던, 그 때 그 사람이었다.
한 때 그가 개인 펀드도 받아서 뭔가 일이 잘 진행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뭔가 일이 꼬였는지, 지금 와서 너는 계속 일을 하고 잘 지내는데 자기는 돈도 못벌고 이 모양 이 꼴이라는 둥, 자기를 왜 피하냐는 둥, 맨날 전화 한다고 해놓고 왜 무소식이냐는 둥, 난리법썩이었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술 많이 마신거 같으니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고 하고 가까스로 달래서 전화를 끊었다.
당연히, 대화방에서 하던 얘기도 끊어질 밖에.

그런데, 다시 또 전화가 왔다. 또 혼자 주절주절... 내가 혹여 자다 받았는지 따위는 물어보지도 않고, 늦게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한 마디 없이, 길고 긴 알아들을 수 없는 넋두리와 나를 향한 원망이 쏟아졌다.
아마, 내가 태어나서 전화로 그렇게 짜증을 내보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시간도 늦은 데다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알아듣겠으니 다음에 통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그 쪽에서 먼저 끊었다.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고 조금 있으려니, 어쩐지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과연, 내가 지킨 예의는 진심이었을까.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rofile
sandman
2001.11.07 15:44
그 사람도 맘도 답답하고 (생각에는 여자친구도 없는 듯 하고..) 누군가 하소연하고 싶은 데 걸 사람도 없고... 그러다 문득 떠 오른 빈센트님께 넋두리 하셨다 생각하고... 우습게도 다음날 빈센트님이 먼저 전화하셔서.... 어제 실수 하신 것 하시냐고... 말하신다면 그 상대방은 무척이나 부끄러워 하실 듯 합니다. 약간 열린 마음으로 본다면... 그 사람도 무지 답답하거나 뭐 그럴 겁니다. 차라리 먼저 전화해 보세요. 그리고 이야기 먼저 하세요. 그럼 맘이 한결 편안해 질 겁니다... 그 사람 아마 기억도 못할 걸요 ^^;
vincent
글쓴이
2001.11.08 00:25
그렇게 참작 가능한 상황 아니라서요.
생각하니, 다시 기가 막힌... ㅡㅡ;;;;;
Profile
sandman
2001.11.08 09:09
기가 막히면 뚫어야지요... ^&^.... 그래도 맘 좋은 빈센트님이 이해하세요... 벌써 이 한해도 다가는 데... 정리할 건 빨리 해야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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